안국진 감독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려서부터 성실히 공부하고 일한 여성 수남이 사회적, 개인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궁지에 몰리다 몇 차례의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이야기다. ‘열심히 일해도 행복해질 수 없는 세상, 행복해지고 싶었어요’라는 영화의 광고 카피는 수남의 살인 동기가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에 있다고 말한다. ‘행복해지려는 욕망’은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가 가장 강조하는 ‘덕목’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행복의 실현은 대출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공장 경리인 수남과 그녀의 장애인 노동자 남편이 행복해지기 위해 한 선택은 집을 사는 것이고, 집을 사려면 대출을 받아야 하며, 대출을 갚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성실히 일해야 한다. 이 벅찬 노동의 시간은, 하지만, 결코 행복의 시간과 자연스레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이를 알고 있다. 어떤 위대한 인문학 강사들은 이 단절을 강조하며 우리더러 자유롭기 위해 ‘백수’가 되라 조언하고, 어떤 쿨한 연예인들은 답답한 서울을 벗어나 제주도로 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공이 될 것이냐, 엘리트가 될 것이냐’는 실존적 선택 앞에서 ‘엘리트’가 되기 위해 ‘여상’에 진학한 수남 같은 여성에게 그런 말들은 그저 비현실적일 뿐이다. 그녀에게 달동네의 집 한 채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기반을 표상한다. 문제는 수남의 ‘허위의식’이 아니라 아무리 일해도 집 한 채 가질 수 없는 ‘이상한 나라’의 현실이다. 이 영화는 2015년판 노동자 수난사로도 읽힌다. 기술 발전 앞에서 장인적 능력이 갑자기 쓸모없어진 노동자, 기계의 도구가 되어버린 노동자, 육체가 망가지자 정신도 함께 망가져버린 노동자들의 익숙하고 오래된 역사가 이 영화 속에 담겨 있다. 노동의 의미를 묻는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이 베네치아(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노동자’라는 단어는 좁게는 실패한 인생을, 넓게는 경제발전의 걸림돌을 의미하게 되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노동자에 대한 인식은 천박하지만 엉뚱하지는 않다. 성실히 노동하면서도 행복은커녕 인간 대우조차 받지 못하며 졸지에 ‘사회악’이 되어버린 노동자들은 뭘 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자살 혹은 투쟁이라고 말한다. 기계에 손가락이 잘린 수남의 남편은 자살 시도를 하다 식물인간이 되고(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의 명곡 ‘불행히도 삶은 계속되었다’를 들어보라), 남편의 병원비를 대려는 수남은 재개발 반대자들을 상대로 살인과 방화를 저지른다. 이 영화가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인 ‘잔혹 살인극’은 궁지에 처한 노동자들의 악에 받친 반격에 가깝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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