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국가공장 체계로 편입된 건 1912년이었다. 총독부는 한국인의 죽음을 소각해서 높은 굴뚝을 통해 허공으로 뿜어냈다. 죽음을 배웅하고 기억하는 전통적 행위 또한 거기 섞여 소각되고 있었다. 묘지·화장장·매장 및 화장 취체규칙. 죽음은 이 법령과 함께 공장 형태로 문명화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죽음 속으로 식민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죽음을 삶의 경계 밖으로 내치는 공동묘지라는 말 자체가 여기서 태어났다. 문명화란 외형상 죽음과 주검에 관한 위생처리였고, 의례절차의 단선화를 통한 검소한 장례문화 확립 등에 있었다. 이들의 진짜 목적은 토지개발에 관한 비효율성 극복, 요컨대 대지 수탈에 대한 대중 저항을 막는 데 있었다. 한국인의 장례의식과 선산 등 씨족 중심 묘지관리 문화는 임업, 농업, 광산 등 식민지개발에 만만찮은 장애물이었다. 철도 건설은 물론 전신주 세우기에도 맞서던 백성들이었다. 신문에는 이따금 ‘달 분화구 같은 공동묘지’ 따위 설명글과 함께 묘지 군락이 항공사진으로 소개되곤 했다. 식민통치기구가 관리감독하면서 죽음은 삶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죽음이 사망한 자리에 남은 건 단순화한 시신처리 과정이었다. 그 압축점이 화장이다. 죽음에 대한 일련의 공세를 통해 농본공동체의 유교 테두리에서 진행되던 죽음의 전통은 이윽고 박멸되어 갔다. 총독부는 한국인의 죽음마저 죽였던 것이다. 일제는 자신들의 거류민을 위해 시구문 밖 고양군 한지면 신당리 솔밭을 대여해서 벽돌탑을 쌓아올린 화장터를 처음 세웠고(1902), 곧 만리현(1907)에 장제장을 마련했다. 조선 500년 동안 여염에서는 없던 화장은 이렇게 부활했다. 공장 형태의 시신소각이 대중화된 건 유명한 홍제동 화장터였다. 1930년 3월1일이었고, 17개 화구 중 정면 5개가 작동이 잘되는 편이었다. 벽제로 옮겨갈 때(1970)까지 불땀 좋은 화구에 죽은 자가 들어가려면 저승 급행료를 찔러주어야 했다. 한국인의 신체 전통에 상징적 타격을 가한 단발령에 이은 신체가 이승을 떠나는 절차인 장례문화 변용에 일제는 이렇듯 치명적 영향을 끼쳤다. 서울 외곽 애오개, 만리재, 당인리 공동묘지를 파헤친 건 주택개발이나 발전소 따위를 짓기 위해서였다. 이태원에 있던 류관순 무덤도 이 과정에서 사라졌다. 죽음은 더 먼 곳으로 쫓겨나고 삶에서 배제당하고 있었다. 이 전통을 이어받은 광복 후 도시개발은 값싼 땅을 찾아 더욱 가속적으로 팽창해 갔다. 죽은 자들이 살던 곳은 산 자들, 곧 주택자본이 점령했다. 저승도 자본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이와 함께 죽음은 장례식장, 공원묘지, 납골당이라는 저승 시장에 급속히 편입되어왔다. 화장장이 5할이 넘는 상황에서 죽음 관리의 상당 부분은 국가행정 중심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비루하게 살아온 삶을 위로하는 초상 절차는 단지 합리성과 효율성일 수만은 없다. 절차는 통과의례에서 삶의 비의가 거처할 수 있는 유일한 양태다. 오래도록 이는 인간문화활동의 집약처였다. 알다시피 오늘날 전국에 산재하는 화장터에서 죽음을 문화적으로 추모·구성하는 경우는 찾아볼 길이 없다. 빠른 소각처리에 지나지 않는 이 화장문화는 일제가 식민지에 남기고 간 야만이다. 국가의 죽음 관리와 기억 체계는 늦었지만 재창조되는 게 마땅하다.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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