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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30 18:39 수정 : 2015.10.30 20:43

이 사람을 보라. 김이섭은 김이정 소설 <유령의 시간>에 나오는 인물이다. <유령의 시간>은 “거리는 온통 잿빛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지형은 편지를 든 채 갑자기 맞은편 아파트를 향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여기 등장하는 거리는 평양이고, 맞은편 아파트는 고려호텔 13층 27호에서 바로 보이는 곳이다. 소설의 배경은 지난 2005년,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과 백두산에서 남과 북의 작가들이 만나 처음으로 성사된 남북작가대회다.

소설 첫 문장에 등장하는 ‘잿빛’은 전쟁통에 처와 삼남매를 이북에 둔 채 남한에서 철저히 헛것의 삶과 유령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아버지 김이섭의 피맺힌 육십 평생의 빛깔을 상징하는 듯하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한 문장에 나오는 ‘지형’은 작가의 분신이다. 아버지의 삶에서 회한의 실체였던 이북의 혈육을 찾아 만난다는 기약조차 없이 남한 작가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해 오래된 봉인된 기억을 여는 맏딸이다. 자전적 소설인 동시에 분단 시대의 한 맺힌 사부곡(思父曲)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딱 40년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아니 쓰게 될 거라고 예감한 지 꼭 40년이 되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써야만 하는 운명과도 같은 소설이었다. 이로써 1970~1980년대 이문구, 이문열, 김원일, 김성동 같은 ‘좌익’ 아버지를 둔 작가들이 쓴 분단문학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나는 김이정의 소설을 보며 해방 70년이란 실상 분단 70년이라는 거대한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김이섭이라는 한 남자의 육십 평생은 말 그대로 재(灰)의 시간들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절 30년을 보내고, 남북 분단 시대 30년을 살다 죽은 이 남자에게 자기 자신의 삶이라는 게 가능했을 수 있을까. 작가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헛것’의 삶이었다고 말한다. 이북에 삼남매, 이남에 사남매를 두고 죽은 이 남자가 남과 북 어디에서도 안녕할 수 있는 안식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이섭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출신이었지만, 사회주의자라는 주홍글자는 독재 치하의 반공체제에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연좌제’라는 낙인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친인척에 이르기까지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러나 김이섭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한다. 그런 김이섭이 ‘사회안전법’이 통과되던 1975년 한 많은 생애를 갑작스레 마감하는 것은 그런 믿음에 대한 반공체제의 형벌이었다.

어느 시인은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여도 좋다”고 썼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에 나오는 이 역설적 표현을 자주 실감하게 되는 시절이다. 시인은 왜 하필이면 ‘더러운 역사’여도 좋다고 말한 것일까.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라는 점을 직시하고 바로 보겠다고 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역사는 강물처럼 흐르지 않는다는 점을 직시하고자 한 태도일 것이다. 김이정의 소설에서 나는 이런 태도를 읽는다. 그런 고리타분한 분단문학 따위는 한물가지 않았느냐고 묻는 이 시절에, 작가는 짐승의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을 살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분단 시대 작가의 길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건너편 아파트를 향해 ‘절규’하는 지형의 행동 앞에서 이산가족의 슬픔을 느낀다.

고영직 문화평론가
최근 정부는 자신들의 시각에서 ‘편집된’ 역사를 미래 세대에게 강요하려는 기억 쿠데타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 ‘편향된’ 국정화 교과서에는 김이섭처럼 분단 시대 유령의 시간을 견뎌야 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단 한 줄도 실리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독재의 추억을 미화하는 교과서 대신에, 남과 북의 이산가족을 이어주는 다리를 놓아야 할 때이다. 독재의 추억 따위는 없다.

고영직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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