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1.27 19:03
수정 : 2015.11.27 19:03
<응답하라 1988>(응8)은 제목이 말해주듯 과거를 ‘불러내는’ 드라마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고증’이다. 지나간 시절의 세세한 일상을 손에 잡힐 듯 재현함으로써, 이 시리즈는 서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몰입시킨다. 이 놀라운 성실성은 훌륭한 만듦새로 과거의 문화를 재현해내는 드라마의 한 ‘장르’로서의 <응답하라>시리즈에 어떤 종류의 권위를 부여한다. <응답하라>시리즈가 비판을 받는 지점 역시 이와 관련되어 있다. 과거를 불러내는 일이 개인적이고 대중문화적인 ‘향수’의 자극에만 머문다는 것이고, 그것이 여러 과거의 모순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중첩되어 있는 한국 사회의 현재 속에서는 일종의 ‘퇴행’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향수는 그저 ‘퇴행’이기만 할까? 주인공 가족만이 중심이었던 전작들과 달리 쌍문동에 사는 네 가족의 삶을 각각 비중있게 묘사하는 <응답하라 1988>의 경우, 가족, 친구에서 이웃과 사회, 국가까지 서사를 확장시키면서 평범한 소시민의 삶에 거대한 시스템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드러내는 데 정성을 쏟는다. 대학생 성보라의 시위와 체포 장면 에피소드는 그 시절 대학생의 정치의식과 가족의 갈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개인과 가족의 절절한 갈등을 만들어낸 주체가 곧 정당성 없는 권위주의 정부였다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가족 앞에서 “잘못한 게 없다”고 소리치던 보라가 경찰 앞에서 딸을 지키는 어머니의 피에 젖은 엄지발가락을 보면서 “잘못했어요”라고 말하며 자수하는 장면은 진짜 ‘잘못한’ 쪽이 어디인지를 시청자에게 묻게 만든다.
무엇보다 <응답하라 1988>에서 의미있는 장면들은 쌍문동 이웃들 간의 ‘정’에 관한 묘사들이다. 음식을 이웃과 나누고, 학용품을 친구에게 빌리고, 서로의 고민을 힘닿는 데까지 해결해주는 장면들은 그저 배경으로 쓰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장 핵심적인 서사의 요소다. 이런 공동체가 존재했기에 공부 못하는 여주인공도, 오타쿠인 6수생도, 소통능력이 없는 천재 바둑기사도 각자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판타지에 가까울지 모른다. 하지만 이웃, 친구, 가족, 타인 사이의 연대에 대한 유토피아적 믿음은 절망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어떤 ‘희망’을 꿈꿔야 하는지 보여주는 소중한 밑그림이기도 하다. <응답하라 1988>에서 국가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믿음을 위협하는 힘이다. 잘못한 것 없는 시위 대학생이나 쫓아다니는 너절한 국가 안에서도 인민들 각자는 이렇게 서로 도우며 끝까지 살아내는 것이다. 지금은 그리 많이 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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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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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의 ‘향수’는 현실도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잊어버린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등불이기도 하다. 부자와 빈자가 서로 돕고, 전교 1등과 999등이 친구가 되고, 이웃의 상처가 외면당하지 않는 유토피아적 이야기는 기실 인민들이 꿈꿔왔던 ‘좋은 세상’에 대한 이미지 자체다. 이러한 이미지 없이는 운동도 변혁도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다. <응답하라 1988>의 향수는 ‘좋은 세상’에 대한 집단적 향수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이미 망해버린 세상이지만, 대중문화는 이러한 급진적이고 집단적인 감각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근원적 힘을 갖고 있다. 이러한 감각의 힘이야말로 대중문화가 가진 정치적 힘이기도 하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는 드라마 주제가의 가사는 결국 이렇게 이어진다.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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