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5.06 19:15
수정 : 2016.05.06 19:15
애초에 어린이날은 다분히 소년메이데이였다. 어린이날이 5월1일로 시작된 건 유교적 권위와 인습, 어른으로부터 해방만을 말한 건 아니었다. 이는 우선 인간해방의 일환으로 유소년 노동 갈취와 억압에서 이들을 분리해내고, 소년주권을 쟁취해내는 각성된 주체, 나아가 민족운동 관점에서 저항하는 성장세대를 길러내는 일이었다. 여기에 일제가 금지하고 있던 메이데이의 의미를 포섭하면서 어린이날은 그해 봄날 인간 대지에 돋아났다.(1922)
‘소년'은 개화기 지식인들에게 침몰해가고 있는 왕조시대 이후를 재창조해낼세대적 전망이자 암울한 미래가 잉태시킨 싱싱한 은유였다. 이를 일거에 뛰어넘은 건 3·1 운동이었다. 연인원 200만명이 쏟아져 나온 거대한 움직임 속에 소년세대들은 일제 총칼 앞에 기꺼이 만세를 부르면서 독립과 해방을 부르짖었다. 3·1 운동은 단지 일제에 항거하는 일에 그친 게 아니라 고종의 죽음과 함께 봉건체제가 끝났다는 걸 불특정 다수 대중의 이름으로 선언하면서 공화정을 탄생시킨 혁명이었다. 우리 헌법 첫 줄에 명토 박혀 있듯 이 혁명은 여전히 한국 근대의 저수지이자 용광로로, 소년대중운동의 뿌리 또한 거기에 닿아 있다.
그해 5월1일 오후 3시 소년운동협회가 소년 문제에 관한 선전지 20만장을 뿌리면서 어린이날은 명백히 운동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 활동에서 지울 수 없는 이름은 김기전이다. 일제 탄압으로 사라졌던 어린이날이 광복 이듬해 5월5일로 부활할 때도 그는 큰 구실을 했다. 그 뒤 김기전은 북으로 갔고 분단은 이들의 역할을 기록에서조차 박멸해버리면서 그 성과를 훔쳐갔다. 인간해방과 각성의 자리에 들어선 건 동심 천사주의 일색이었다. 당초 이들이 말한 소년은 당연히 남자만을 이르는 게 아니었다. 연령 또한 만 7세에서 만 16세였는데 학교로 치자면 소학교에서 중등교육과정 전반을 아우르는 세대였다.
이 어린이들을 집요하게 보호 대상화하고자 한 건 일제였다. 대형 병원 따위들은 보건 개념 등으로 이에 적극 호응했다. 이는 식민지 지배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일이자 영리목적을 동반한 것이었다. 보릿고개 시대에 나타나서 보릿고개와 함께 시나브로 자취를 감춘 우량아대회는 그 모순된 결절점이었다. 고궁을 무료로 들어오게 하고,놀이터등을 열어 유희로 이끈 건총독부였다.(1923)
광복 이후 이러한 행태는 계승, 강화되어 어린이 연령을 아래로 끌어내리면서 흔히 알고 있는 어린이날에 빠르게 접근해왔다. 어린이가 본격적으로 국가나 권력자가 베푸는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1960년대였다. 어머니날과 더불어 5월은 국가가 주도하는 가정의 달로 전도되었고 그 핵심 주제는 은혜와 시혜였다. 세계를 발견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 어린이는 소멸해버린 것이다.세상에 출현할 때 거룩하게 불순했던 어린이날은 지독히도 순수하게 거세된 잔치로 살아가도록 하는 운명을 거듭해서 강요받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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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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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혁명이 탄생시킨 인권에 힘입어 산업사회 예비노동자로 통일된 문자와 산술교육 등을 받아야 하는 세대는 등장했다. 이를 기리는 어린이날이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백화점과 놀이동산 삐끼가 된 지는 오래다. 봉건과 노동억압에서 해방되자 권력이 어린이를 장악했고 이내 교육자본과 상품자본에 완전히 포위된 형국인 것이다. 이 어린이날을 해방시키는 또 다른 어린이날의 기원을 창조해야 하는 건 누구 몫인가.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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