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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20 20:02 수정 : 2016.05.21 14:24

최근 발생해 사회적인 파장을 낳고 있는 서울 강남역 화장실 여성 살인사건은 한 포털 사이트에서 ‘강남역 묻지마’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 대한 살인을 ‘묻지마 살인’으로 칭하는 일은 마치 그 살인에 이유가 없다는 식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과연 ‘이유’ 없는 살인이 있을까?

실제로 강남역 살인사건의 용의자는 ‘여성들이 그동안 자신을 모욕’했기에 살인을 감행했다고 말한다. 이 살인이 ‘묻지마 살인’이 아님을 보여준다. ‘묻지마 살인’이었다면 살인자는 그 누가 화장실에 들어왔더라도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다. 화장실에 숨어 1시간 반을 기다리다 남자들을 보내고 여자만을 노렸다면 이것은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여성혐오에 따른 계획적 살인’인 것이다.

여성들이 추모의 글을 올리면서 이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살인’으로 규정하자 남성들은 발끈하고 있다. 정신병자의 행위를 여성혐오 범죄로 둔갑시켜서 남성 전체를 잠재적 살인자로 만든다는 논리다. 이러한 논리는 여성혐오 감정이 널리 퍼져 있는 가부장제 사회인 한국에서 폭력의 위험을 일상적으로 당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여성의 취약함을 모른척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용의자의 말이 설사 변명을 위한 거짓이라고 해도, 그가 그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정신병자에 지나지 않았다 해도, 이 사건 앞에서 한국 여성이 보이는 동일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시각 그 장소에 자신이 들어갔다면 단지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강의실에서 만났던 20~30대 여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크든 작든 여성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경험한 바 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의 추행에서부터 골목길의 강간미수에 이르기까지, 취객이 무턱대고 휘두르는 주먹질에서부터 헤어진 애인의 복수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는 많고도 많다. 오늘 하루 무사했다면 그것은 ‘운’이 좋았던 것일 뿐이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치마 속 몰카를 찍고, 이별을 통보했다고 납치하며, 인사불성인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온라인에서 모의하는 남성들에 대한 뉴스는 과연 ‘강남역 살인사건’과 무관한 것일까? 여성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강도만 다를 뿐 동일한 사건의 변주가 아닐까?

‘여성혐오’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혐오를 ‘당하는’ 사람은 언제나 약자다. 유대인 혐오, 동성애자 혐오, 전라도 혐오, 장애인 혐오는 있어도 그 반대는 없다. 그것은 혐오가 아니라 혐오에 대한 ‘반발’이다. 강자인 남성에 의한 여성혐오는 성추행부터 살인까지, 취업 차별에서부터 유리천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의 폭력을 부르지만, 그에 대한 여성의 반발은 오직 ‘말’의 영역에만 있으며 그 어떤 실제적 결과도 낳지 못한다. 남성지배사회에서는 ‘남성혐오’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여성혐오는 그래서 ‘약자’ 일반에 대한 혐오의 다른 버전이다. 먹고사는 모든 일이 생존 전쟁이 되어버리는 시대일수록 강자와 약자 간의 차별과 혐오와 폭력은 더 강해진다. 전쟁터에서 그렇듯이 말이다. 오늘날의 전쟁터에서 강자와 약자의 구분은 유동적이다. 거주지 없이 알바를 하며 살았다는 이번 살인사건의 용의자도 사회적으로는 약자였다. 그런 약자도 단 한 가지 점에서만은 ‘강자’였다. 그는 ‘남자’였던 것이다. 생물학적 성별이 일상적 차별과 폭력에서부터 죽음에까지 ‘쉽게’ 연결되는 성차별 사회. 오늘 한국 여성들의 분노는 이 점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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