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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6.03 18:51 수정 : 2016.06.03 21:35

평상이 사라졌다. 자주 애용하는 동네 가게 앞에 놓인 평상이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지 않는다. 평상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순간, 비빌 언덕이 사라진 것 같은 상실감이 엄습한다. 유년 시절에 다니던 초등학교가 폐교되어 노인요양병원으로 변신한 모습을 보며 우두망찰 유년의 추억을 빼앗긴 듯한 비애감에 젖던 기억마저 떠오른다. 십년 남짓 나는 얼마나 자주 삼선 슬리퍼를 신고 1마일룩을 입은 채 가게 앞 평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음료수를 마시고, 밤새 쓴 원고를 고쳤던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평상이 사라지는 현상은 내가 사는 동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느슨하게 이어주며 ‘1/n의 정치학’을 구현하는 평상이라는 존재 자체가 우리 삶의 영역에서 점점 축출되고 있다. 문화예술판의 경우 평상의 부재 현상이 심각하다. 지난 1일 문화연대가 주최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존재의 이유를 묻다’ 토론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보면 지금의 문화예술위원회의 경우 현장 예술가들로 구성된 부문별 위원회 체계가 자율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문제의 원인이 있다. 평상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두런두런 대화하는 수평적인 민주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것이다. 수평적인 대화 채널이 사라진 자리를 대체한 것은 상부에 충성하며 검열관의 눈으로 예술 현장을 보려는 ‘수직적인’ 관료주의 시스템이다. 수직적인 시스템이 문제인 것은 구성원들의 내면까지 ‘마음의 관료화’ 현상을 부채질한다는 점이다. 위원회 운영에 있어 공론장으로서 평상을 시급히 복원해야 한다.

평상의 복원은 지방 문화예술 행정에서도 요청된다. 탑을 쌓는 일은 시간이 걸리지만, 탑을 무너뜨리는 일은 한순간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실감하게 되는 시절이다. 부산영화제에 대한 행정의 과도한 개입 논란을 보라. 십수년간 지속되어온 거창연극제가 하루아침에 폐지 위기에 처하고, 경제적 효율성을 들어 경기도문화의전당을 비롯해 경기도박물관 등 문화시설들이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존폐의 기로에 서 있는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입으로는 협치(協治)의 거버넌스를 말하지만, 지역 협력체계가 깨지며 배반당한 거버넌스가 우리나라 문화행정의 초라한 현주소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평상 하나 놓아야 한다. 이때의 평상이란 푸코가 <헤테로토피아>에서 “우리는 순백색의 중립적인 공간 안에서 살지 않는다”고 말한 점이지대로서의 평상을 의미한다. 평상이 없는 동네는 인기척 없는 동네와 다를 바 없다. 느티나무 아래 놓인 평상에서는 ‘드루와’의 환대가 가능하다. 때로는 과도한 참견이 귀찮아질 때도 분명 있다. 그러나 평상에서는 사적 이익보다는 공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야기가 오간다. 공유지의 일종으로서 평상을 복원하고 수평적 협력체계가 깨지지 않도록 실천해야 한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그러나 협력체계는 저절로 형성되지 않는다. 시간 속에 의미를 넣는 발효의 시간이 요구된다. 촉진과 합의의 기술을 주고받는 인내의 시간이 요구되는 것이다. 서로 손잡기가 협력의 예술인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비롯해 지금의 문화행정은 무엇이 행정의 철학이고, 무엇이 협력의 예술인가에 대한 비판적 자기성찰이 부재한 데에서 비롯한다. 문화예술 행정에 대한 현장 예술가들의 신뢰의 철회 현상이 극에 달한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여름이다. 평상이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나는 이제 동네에서 어디로 가야 하나.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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