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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6.24 19:25 수정 : 2016.06.24 19:30

정용준, 김금희, 한강의 소설을 읽는다. 저마다 음색과 음역은 다르지만,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곁’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갈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희박해지는 곁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구현하며, 사회적 장소의 소멸에 맞서고자 한 작품들이다.

한강의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은 죽은 유령과의 대화라는 형식으로 누군가의 곁에 있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담담히 풀어낸 작품이다. 시사잡지 파업에 참여하고, 직장 내 차별에 저항한 옛 직장상사인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뒤늦게 애도하는 형식을 취한다. 지금은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어버린 그들은 직장에서 자신들이 겪는 ‘곤란과 괴로움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그들은 ‘위험은 너 스스로 감당하라’라는 신자유주의의 슬로건처럼 철저히 개인의 문제였을 뿐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거라는 말’이 누군가에게 잔인한 말이 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젊은 작가 정용준의 소설집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가 집요하게 되묻는 대목이 바로 그 지점이다. 정용준의 소설은 좋은 문학이 기본적으로 내장하고 있는 이상한 불편함의 감정을 선물한다. 이 감정은 내 안의, 혹은 우리 안의 죄의식을 집요하게 심문하는 글쓰기에서 비롯한다. 특히 주목하며 읽은 작품은 <안부>라는 소설이다. 작품 속 화자는 군대에서 의문사한 아들의 신원회복을 위해 육년째 군 당국과 싸우는 중년여성이다. 아들의 죽음에 함께 아파하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 여성의 지난한 싸움을 회피한다. 목사님도, 아들의 군대 상사도, 누구도 이 여성의 곁에 머물려 하지 않는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아들을 냉동고에 내버려두는 비정한 어머니라고, 아들 팔아서 팔자 고치려는 독종이라 모욕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정용준은 소위 착한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 사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지를 냉정한 시선으로 묘파한다.

그러면 사람 냄새 나는 인간적인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 정용준은 작중 화자가 같은 트라우마를 안고 평생 살아갈 수밖에 없는 박 이병의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을 제시한다. 두 여성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우는 것이다. 세월호라는 표현이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지만, 이 장면을 보며 자식을 잃은 세월호 희생자 어머니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실컷 울 만큼 운 두 여성이 죽은 아들의 생전 모습을 회상하며 마음껏 ‘자식 자랑’하는 장면에서 어찌할 수 없이 눈물이 고인다. 그리고 사람의 도리와 시민의 시민됨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곁을 생각하며 인간의 인간성을 묻고 또 묻는 문학의 윤리는 이 지점에서 형성되는 것이리라. 김금희가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세상의 견고한 중력장에서 겨우 존재하는 듯한 필용과 양희라는 인물들을 통해 ‘아주 없음’이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를 긍정하려는 것도 곁에 있어줌의 의미라고 말할 수 있다.

고영직 문화평론가
우리는 헬조선에서 각자도생을 하며 살아간다. 누구나 각자도생을 꿈꾸지만, 어쩌면 우리는 ‘각자고생’을 하며 겨우 연명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사는 사회를 ‘비빌리힐스’로 바꾸어야 한다. 비빌리힐스(비빌里Hills)라는 말은 삼년 전 내가 ‘작명’한 표현이다. 비빌 언덕이라는 말에 마을(里)과 언덕(Hills)을 더해 변주한 것이다. 마을에는 비빌 언덕이 있다는 뜻도 되고, 마을이 비빌 언덕이라는 의미도 될 성싶다. ‘비빌리힐스’ 대한민국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와 우리 곁을 살펴야 할 필요가 있으리라 믿는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오직 너를 쬐어야만 할 때가 있다”(백무산). 바로 지금이 그때다. 그동안 우수마발의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린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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