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재일사학자 정영환 교수의 저작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이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망각을 위한 화해-‘제국의 위안부’와 일본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올해 3월 일본에서 출간된 것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펼친 주장의 타당성 문제를 치밀한 문헌대조와 방법론 비판을 통해 실증적·역사적·비판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제국의 위안부> 비판과 더불어, 저자가 이 책에서 치밀하게 논증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이른바 진보적·리버럴 진영의 지식인조차 갇혀 있는 두 종류의 ‘긍정 소망’의 문제점이다. 하나는 대일본제국으로 상징되는 전전(戰前)의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대한 망각 경향이다. 다른 하나는 전후 일본이 평화국가라는 긍정과 이러한 소망 형태가 실제로 왜곡하고 있는 역사적·사상적 뒤틀림이다. 실제로 전후 일본 지식인들의 천황제 파시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언설을 검토해보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단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또는 1941년 미국과의 태평양전쟁 과정에서의 파시즘적 경향만을 제한적으로 비판의 자리로 소환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파시즘의 원인을 군부독주에서 찾고, 천황의 경우는 전쟁 책임에서 면죄시키는 것을 자연스럽게 간주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대일본제국 긍정 원망(願望)’이라는 것이다. 전전 일본의 식민주의·제국주의의 침략 책임을 망각한 것의 결과는 일본의 전후 인식에도 커다란 왜곡을 초래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서는 이른바 역사수정주의의 거센 흐름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난징대학살, 일본군 위안부, 오키나와 집단자결과 같은 제국주의·식민주의 책임은 은폐·왜곡·부정된다. 정영환 교수가 집중분석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만 한정해 보아도, 한·일 외교문서나 지식인들의 담론 등을 통해 강화되고 있는 것은 전전과 전후의 일본사 모두를 긍정하고자 하는 일본적 내셔널리즘이다. 그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의 지식사회 안에서 극적인 환호와 상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지식사회학적 맥락에도 주목한다. 이는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들조차 전전의 식민주의·제국주의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일본이 평화헌법에 기반한 평화국가가 되었음을 긍정하려는 ‘이중의 긍정 소망’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런 사상계의 은폐된 맥락을 검토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담론을 분석해야 사태의 본질이 명료하게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이 정영환 교수의 입장인 듯하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이른바 ‘<제국의 위안부> 사태’를 비판적으로 논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층에서는 일본의 전후 사상계의 맹점을 근본적으로 탈구축하고 있는 문제적 저작이다. 이런 저작이 재일조선인 사학자에 의해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면에서 필연이자 아이러니다. 필연의 관점에서 보자면, 마치 ‘클라인씨의 병’처럼, 그가 한국과 일본 양 국가에서 내부이자 외부인 존재, 즉 ‘사이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자기화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이러니도 있다. 한국과 일본 일방으로의 정체성의 귀속을 거부한 까닭에 책이 넘는 국경을, 사람은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이 처해 있는 반(半)난민적 상황의 본질은 한·일 양국 정부가 역사적으로 은폐한 기민(饑民) 정책의 동질성에 대해서도 묻게 만든다.
칼럼 |
[크리틱] 사람은 넘지 못한 이유 / 이명원 |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재일사학자 정영환 교수의 저작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이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망각을 위한 화해-‘제국의 위안부’와 일본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올해 3월 일본에서 출간된 것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펼친 주장의 타당성 문제를 치밀한 문헌대조와 방법론 비판을 통해 실증적·역사적·비판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제국의 위안부> 비판과 더불어, 저자가 이 책에서 치밀하게 논증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이른바 진보적·리버럴 진영의 지식인조차 갇혀 있는 두 종류의 ‘긍정 소망’의 문제점이다. 하나는 대일본제국으로 상징되는 전전(戰前)의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대한 망각 경향이다. 다른 하나는 전후 일본이 평화국가라는 긍정과 이러한 소망 형태가 실제로 왜곡하고 있는 역사적·사상적 뒤틀림이다. 실제로 전후 일본 지식인들의 천황제 파시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언설을 검토해보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단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또는 1941년 미국과의 태평양전쟁 과정에서의 파시즘적 경향만을 제한적으로 비판의 자리로 소환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파시즘의 원인을 군부독주에서 찾고, 천황의 경우는 전쟁 책임에서 면죄시키는 것을 자연스럽게 간주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대일본제국 긍정 원망(願望)’이라는 것이다. 전전 일본의 식민주의·제국주의의 침략 책임을 망각한 것의 결과는 일본의 전후 인식에도 커다란 왜곡을 초래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서는 이른바 역사수정주의의 거센 흐름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난징대학살, 일본군 위안부, 오키나와 집단자결과 같은 제국주의·식민주의 책임은 은폐·왜곡·부정된다. 정영환 교수가 집중분석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만 한정해 보아도, 한·일 외교문서나 지식인들의 담론 등을 통해 강화되고 있는 것은 전전과 전후의 일본사 모두를 긍정하고자 하는 일본적 내셔널리즘이다. 그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의 지식사회 안에서 극적인 환호와 상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지식사회학적 맥락에도 주목한다. 이는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들조차 전전의 식민주의·제국주의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일본이 평화헌법에 기반한 평화국가가 되었음을 긍정하려는 ‘이중의 긍정 소망’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런 사상계의 은폐된 맥락을 검토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담론을 분석해야 사태의 본질이 명료하게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이 정영환 교수의 입장인 듯하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이른바 ‘<제국의 위안부> 사태’를 비판적으로 논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층에서는 일본의 전후 사상계의 맹점을 근본적으로 탈구축하고 있는 문제적 저작이다. 이런 저작이 재일조선인 사학자에 의해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면에서 필연이자 아이러니다. 필연의 관점에서 보자면, 마치 ‘클라인씨의 병’처럼, 그가 한국과 일본 양 국가에서 내부이자 외부인 존재, 즉 ‘사이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자기화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이러니도 있다. 한국과 일본 일방으로의 정체성의 귀속을 거부한 까닭에 책이 넘는 국경을, 사람은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이 처해 있는 반(半)난민적 상황의 본질은 한·일 양국 정부가 역사적으로 은폐한 기민(饑民) 정책의 동질성에 대해서도 묻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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