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어떻게 그 시절에 이런 작품이 쓰였나 하는 경탄이랄지 탄식이랄지에 조우하는 일이 종종 있다. 내게 요산 김정한의 <오키나와에서 온 편지>(1977)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 작품은 몇몇 수기나 증언 등의 논픽션을 제외하자면, 한국문학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국인(조선인)의 오키나와 체험을 조명하고 있다. 소설 속의 오키나와인들에 의해 발설되는 태평양전쟁 말기 강제연행된 조선인 위안부·징용 노동자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1970년대 외화벌이를 위해 오키나와의 파인애플 농장에 파송되었던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통해 요산은 식민주의와 냉전, 그리고 산업화의 문제를 밀도 있게 환기하고 있다. 이 소설의 도입부에서 작가를 연상시키는 서술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문예평론가가 나를 평하기를 체험하지 않은 일은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거니와, 사실 나는 그물을 가지고 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는 자신이 없다.” 그렇다면 요산은 한국인(조선인)과 오키나와인의 만남을 어떻게 서사화할 수 있었는가. 체험하지도 않은 일을 말이다. 게다가 당시는 오늘날처럼 자유롭게 오키나와를 취재·조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공간적 배경 역시 오키나와 본도로부터도 태평양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도(離島)인 미나미다이토지마(南大東島)였는데 말이다. 물론, 오늘의 작가라면 인천에서 오키나와의 나하공항으로 이동한 후, 나하의 도마리항에서 미나미다이토지마로 운항하는 페리를 타고 현지에 도착, 그곳의 지형과 과거의 흔적들을 답사하고, 이 섬과 관련해 축적되어 있는 다양한 문헌자료를 검토할 수 있다. 또 현지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구체화된 기억과 인상들을 직조해내는 방식으로 소설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산이 이 소설을 쓰고 발표했던 당시는 해외여행 자유화 조처(1988)가 이루어지기 이전이어서, 단지 소설을 쓰겠다고 오키나와로 가는 일은 어려웠고, 특히 미나미다이토지마와 관련한 한국어 자료란 거의 희박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물론 요산이 일본어 문헌이나 신문을 참조했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소설을 썼단 말인가. 이 소설을 당시 냉전체제의 역사적 국면과 연결시켜 치밀하게 검토한 임성모 교수의 논문인 <월경하는 대중: 1970년대 한국 여성노동자의 오키나와 체험>을 읽어보면, 아마도 요산은 오키나와로의 계절노동자 파견과 관련된 한국의 신문기사를 적극적으로 검토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냉전기의 관제보도와 유사한 기사를 요산이 기계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니다.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1972), 일본과 중국의 국교수립(1972)과 이에 따른 대만과의 단교, 오키나와 해양엑스포와 한국관의 개관(1975) 등의 보도를 비판적으로 참조하면서, 오키나와에 파송된 한국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상상력을 동원해 재구성했을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상해댁’과 같은 오키나와 거주 옛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형상화는 오키나와에 거주하고 있던 배봉기 할머니 등의 사례가 참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요산은 “그물을 가지고 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를 쓰는 문단 일각의 소설적 경향에 위화감을 표현했다. 요산 특유의 ‘비판적 상상력’이 없었다면, 이런 소설은 결코 쓰이지 못했을 것이다. 요산은 상상력의 경험적·물질적 기반을 중시했다. 하나의 사건을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인식과 감각 속에서 조직화하는 그의 시각은 성숙한 리얼리즘이다.
칼럼 |
[크리틱] 요산 김정한의 소설을 읽다가 / 이명원 |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어떻게 그 시절에 이런 작품이 쓰였나 하는 경탄이랄지 탄식이랄지에 조우하는 일이 종종 있다. 내게 요산 김정한의 <오키나와에서 온 편지>(1977)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 작품은 몇몇 수기나 증언 등의 논픽션을 제외하자면, 한국문학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국인(조선인)의 오키나와 체험을 조명하고 있다. 소설 속의 오키나와인들에 의해 발설되는 태평양전쟁 말기 강제연행된 조선인 위안부·징용 노동자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1970년대 외화벌이를 위해 오키나와의 파인애플 농장에 파송되었던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통해 요산은 식민주의와 냉전, 그리고 산업화의 문제를 밀도 있게 환기하고 있다. 이 소설의 도입부에서 작가를 연상시키는 서술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문예평론가가 나를 평하기를 체험하지 않은 일은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거니와, 사실 나는 그물을 가지고 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는 자신이 없다.” 그렇다면 요산은 한국인(조선인)과 오키나와인의 만남을 어떻게 서사화할 수 있었는가. 체험하지도 않은 일을 말이다. 게다가 당시는 오늘날처럼 자유롭게 오키나와를 취재·조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공간적 배경 역시 오키나와 본도로부터도 태평양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도(離島)인 미나미다이토지마(南大東島)였는데 말이다. 물론, 오늘의 작가라면 인천에서 오키나와의 나하공항으로 이동한 후, 나하의 도마리항에서 미나미다이토지마로 운항하는 페리를 타고 현지에 도착, 그곳의 지형과 과거의 흔적들을 답사하고, 이 섬과 관련해 축적되어 있는 다양한 문헌자료를 검토할 수 있다. 또 현지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구체화된 기억과 인상들을 직조해내는 방식으로 소설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산이 이 소설을 쓰고 발표했던 당시는 해외여행 자유화 조처(1988)가 이루어지기 이전이어서, 단지 소설을 쓰겠다고 오키나와로 가는 일은 어려웠고, 특히 미나미다이토지마와 관련한 한국어 자료란 거의 희박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물론 요산이 일본어 문헌이나 신문을 참조했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소설을 썼단 말인가. 이 소설을 당시 냉전체제의 역사적 국면과 연결시켜 치밀하게 검토한 임성모 교수의 논문인 <월경하는 대중: 1970년대 한국 여성노동자의 오키나와 체험>을 읽어보면, 아마도 요산은 오키나와로의 계절노동자 파견과 관련된 한국의 신문기사를 적극적으로 검토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냉전기의 관제보도와 유사한 기사를 요산이 기계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니다.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1972), 일본과 중국의 국교수립(1972)과 이에 따른 대만과의 단교, 오키나와 해양엑스포와 한국관의 개관(1975) 등의 보도를 비판적으로 참조하면서, 오키나와에 파송된 한국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상상력을 동원해 재구성했을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상해댁’과 같은 오키나와 거주 옛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형상화는 오키나와에 거주하고 있던 배봉기 할머니 등의 사례가 참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요산은 “그물을 가지고 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를 쓰는 문단 일각의 소설적 경향에 위화감을 표현했다. 요산 특유의 ‘비판적 상상력’이 없었다면, 이런 소설은 결코 쓰이지 못했을 것이다. 요산은 상상력의 경험적·물질적 기반을 중시했다. 하나의 사건을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인식과 감각 속에서 조직화하는 그의 시각은 성숙한 리얼리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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