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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05 18:04 수정 : 2016.08.05 19:07

허문영
영화평론가

지난번(7월16일치) 이 지면에서 “그(이스트우드)가 트럼프를 공식 지지하고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이스트우드에 대한 오래된 애정을 이제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맺은 데 대해 몇 사람으로부터 지적을 들었다. 작품과 작가의 삶은 별개가 아닌가, 당신도 다른 글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라는 지적이었다.

그 지적이 맞다. 3년 전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에 대해 쓸 때, 나는 존경하는 미국 평론가인 조너선 로젠봄이 오바마에 대한 정치적 판단을 근거로 <링컨>을 비판한 점에 대해 실망감을 표한 적도 있다. 작품에 대한 평가와 작가의 삶에 대한 윤리적 정치적 판단은 엄격히 분리하는 게 맞다. 나아가 작품에 대한 평가에 일체의 작품 외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게 맞다. 여전히 그렇게 믿는다.

문제는 내가 흔들린다는 것이다. <변호인>에 대해 쓸 때 흔들렸고 그 외에도 몇 차례 흔들렸을 것이다. 흔들린다는 것이 정당화되거나 옹호될 수는 없다. 하지만 평자이면서 동시에 세속적 연루자로서 나는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기 힘들다. 지난번 글의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되면 지지를 거두겠다’는 결단의 선언이 아니라, 흔들림의 고백으로 읽어주기를 바라고 썼다.

다만 위의 지적을 듣고, 남의 나라 정치 문제에 내가 왜 흔들렸을까를 생각해보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트럼프가 무섭다. 그가 매혹적이기 때문에 무섭다. 거리의 광대가 아닌 대선 후보가 정치적 올바름의 규율에 눌려 있던 막말을 토해내는 광경에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 있다. 그가 현실 정치의 장에서 막말의 공연을 상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막말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별개의 정치적 강점이 있는 게 아니라, 막말이 그의 정치성과 매력의 중핵인 것 같다.

혹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가 미학적이기 때문에 무섭다. 발터 베냐민은 파시즘의 역사적 귀결이 ‘정치적 삶의 심미화’라고 믿었는데, 이것이 트럼프가 하고 있는 일이다. 그것은 “대중으로 하여금 결코 그들의 권리를 찾게 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표현하게 함으로써 구원책을 찾는 것”이다.

약간 다른 의미에서지만 이슬람국가(아이에스·IS) 역시 미학적이다. 뉴욕 쌍둥이 빌딩을 붕괴시킨 알카에다의 테러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이다. 거기엔 테러 대상의 상징성에 대한 고려가 있고, 파급효과에 대한 현실적인 계산도 있다. 하지만 아이에스의 2015년 파리 테러와 그 추종자가 벌인 올해의 니스 테러는 밑도 끝도 없는 무차별 살육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일체의 합목적성이 제거된 이 테러는 그것의 유일한 목적이 테러의 상연이라는 점에서 심미화한 테러다.

상당수의 예술은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도구적 합리성의 반명제로 존중받아왔다. 현대 문명이 억압한 혼돈과 무질서, 몽상과 광기, 도취와 도착은 많은 작품 속에서 귀환했고 대체로 환대받았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현실에서 스스로 심미화하는 육중한 정치와 테러와 대면하고 있다.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표현에 전념하는 거대 정치, 자신을 설명 불가능한 공포의 존재로 신비화하는 거대 테러 앞에서 할 말을 찾기 힘들다. 그중 어떤 것은 내가 마음을 빼앗겨온 영화 속 인물 혹은 태도를 닮아 있어 흔들린다. 현실의 문제 해결 전망이 사라져가고 정치가 심미화할 때, 영화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옹호해야 하는가. 베냐민은 예술의 정치화를 외쳤지만, 21세기의 대답은 아닌 것 같다. 두고두고 고민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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