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점점 헤아리기 어려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를 사이임을 염두에 두고 허투루 대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오랜 속담은 낯선 이를 대할 때 견지해야 할 윤리를 간결하게 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말은 아무런 쓸모 없는 세상의 풍경을 매일 마주한다. 누가 누구를 험하게 대했다는 소식은 거의 매분마다 들려오지 싶다. 막돼먹은 자들로 가득한 지옥에서 사는 듯싶다며 누군가 푸념을 해도 꼼짝없이 대꾸 한마디 못 할 지경인 셈이다. 그러나 한 발짝 물러나 생각해보면 또 사정은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 번의 만남도 소중하게 생각하겠다고 다짐하는 공손한 편지를 보내오는 식당이나 호텔을 보면 세상은 더없이 친절하다. 환대 혹은 대접이란 것이 상품화된 지는 제법 오래다. 상업적인 여행이 등장하면서 낯선 이들을 대하는 호텔이나 항공 서비스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친절함의 표준화는 이제 더없이 확장되었다. 물론 생면부지의 낯선 곳을 가도 불안을 덜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세계적으로 동일한 친절함의 코드 덕일 것이다. 지구화의 또 다른 일면은 이처럼 힐튼이니 하얏트니 노보텔이니 하는 호텔 체인과 세계적인 항공사들이 만들어놓은 접대의 언어들일 것이다. 하긴 말끝마다 님을 붙이는 일은 이제 호텔이나 항공기 승무원의 전용 어휘가 아니라 거의 일상 어디에서나 범람한다. 어디를 가든 친절함을 요구하고 또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우리의 믿음은 일상적 교유가 일어나는 모든 곳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정복하여 왔다. 억지웃음과 상냥함은 친절함을 매뉴얼로 만들어놓고 다듬고 판매해야 할 상품으로 처분한다. 타인을 대하는 감정만큼 자발적이고 정직한 게 없어야 할 텐데, 그걸 표준적인 몸짓으로 처방하고 판매한다는 것은 어쩐지 거북하고 또 위선적이라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친절하게 굴기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역시 잘 알려져 있다. 감정노동이니 하는 말로 많은 말들이 오간 만큼 접객이나 상담을 맡아 일하는 노동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친절과 공손한 대접, 따뜻한 환대가 마땅히 누릴 것이라고 간주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또 우리는 이러한 환대와 다정한 대접이 사라진 걸 두고 서로를 나무라는 데 분주하다. 굴욕, 모욕, 모멸, 갑질, 폭력, 혐오 같은 말이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데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갑갑하다. 그런 말들이 널리 회자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구조니 체계니 하는 것을 떠들어봤자 허공에 뜬 말처럼 들리는 터에, 세상의 문제를 내가 겪은 작은 경험의 세계에서 찾고 헤아리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윤리적 문제가 또한 사회적 문제라는 것은 명민한 철학자들이 항상 유념했던 주제이다. 그들은 개인의 주관적인 의식으로서의 도덕과 사회생활의 규칙 안에 스며 있는 객관적인 윤리가 다른 것임을 일깨운다. 헤겔 같은 철학자는 후자를 윤리적 실체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말 그대로 개인의 마음 씀씀이가 관건인 것이 아니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레 행동하기만 해도 사회생활의 규칙 자체가 서로를 선하게 대하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윤리적인 옳음이다. 윤리는 누군가의 양심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활동의 규칙 속에 객관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세계 없이 환대도 없을 것이다.
칼럼 |
[크리틱] 환대만으로는 턱도 없다 |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점점 헤아리기 어려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를 사이임을 염두에 두고 허투루 대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오랜 속담은 낯선 이를 대할 때 견지해야 할 윤리를 간결하게 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말은 아무런 쓸모 없는 세상의 풍경을 매일 마주한다. 누가 누구를 험하게 대했다는 소식은 거의 매분마다 들려오지 싶다. 막돼먹은 자들로 가득한 지옥에서 사는 듯싶다며 누군가 푸념을 해도 꼼짝없이 대꾸 한마디 못 할 지경인 셈이다. 그러나 한 발짝 물러나 생각해보면 또 사정은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 번의 만남도 소중하게 생각하겠다고 다짐하는 공손한 편지를 보내오는 식당이나 호텔을 보면 세상은 더없이 친절하다. 환대 혹은 대접이란 것이 상품화된 지는 제법 오래다. 상업적인 여행이 등장하면서 낯선 이들을 대하는 호텔이나 항공 서비스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친절함의 표준화는 이제 더없이 확장되었다. 물론 생면부지의 낯선 곳을 가도 불안을 덜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세계적으로 동일한 친절함의 코드 덕일 것이다. 지구화의 또 다른 일면은 이처럼 힐튼이니 하얏트니 노보텔이니 하는 호텔 체인과 세계적인 항공사들이 만들어놓은 접대의 언어들일 것이다. 하긴 말끝마다 님을 붙이는 일은 이제 호텔이나 항공기 승무원의 전용 어휘가 아니라 거의 일상 어디에서나 범람한다. 어디를 가든 친절함을 요구하고 또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우리의 믿음은 일상적 교유가 일어나는 모든 곳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정복하여 왔다. 억지웃음과 상냥함은 친절함을 매뉴얼로 만들어놓고 다듬고 판매해야 할 상품으로 처분한다. 타인을 대하는 감정만큼 자발적이고 정직한 게 없어야 할 텐데, 그걸 표준적인 몸짓으로 처방하고 판매한다는 것은 어쩐지 거북하고 또 위선적이라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친절하게 굴기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역시 잘 알려져 있다. 감정노동이니 하는 말로 많은 말들이 오간 만큼 접객이나 상담을 맡아 일하는 노동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친절과 공손한 대접, 따뜻한 환대가 마땅히 누릴 것이라고 간주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또 우리는 이러한 환대와 다정한 대접이 사라진 걸 두고 서로를 나무라는 데 분주하다. 굴욕, 모욕, 모멸, 갑질, 폭력, 혐오 같은 말이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데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갑갑하다. 그런 말들이 널리 회자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구조니 체계니 하는 것을 떠들어봤자 허공에 뜬 말처럼 들리는 터에, 세상의 문제를 내가 겪은 작은 경험의 세계에서 찾고 헤아리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윤리적 문제가 또한 사회적 문제라는 것은 명민한 철학자들이 항상 유념했던 주제이다. 그들은 개인의 주관적인 의식으로서의 도덕과 사회생활의 규칙 안에 스며 있는 객관적인 윤리가 다른 것임을 일깨운다. 헤겔 같은 철학자는 후자를 윤리적 실체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말 그대로 개인의 마음 씀씀이가 관건인 것이 아니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레 행동하기만 해도 사회생활의 규칙 자체가 서로를 선하게 대하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윤리적인 옳음이다. 윤리는 누군가의 양심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활동의 규칙 속에 객관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세계 없이 환대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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