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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15 20:23 수정 : 2017.09.15 20:29

서동진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거의 이십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어느 해 보았던 한편의 영화가 자꾸 기억에 떠오르곤 한다. 그것은 어느 여자중학교 학생들이 만든 영화였다. 그 영화의 제목은 <너희가 중딩을 아느냐>였다. 방송반 학생들이 만든 그 영화는 큰 상을 탔지만, 충격적인 내용에 놀란 학교 측이 문제 삼으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나는 영화를 만든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끼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요즈막 여중생 폭력 사태를 둘러싼 주변의 심상찮은 기운을 생각하면 이 영화가 더욱 새삼스럽다.

이 영화는 모범적인 여중생들이 자신들과 극단적인 반대편의 세계에 있던 아이들, 즉 “노는 아이들”을 찍은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시쳇말로 싱크로율이 백프로다. 실제로 노는 아이들이라는 여중생들이 출연해 자신들의 삶을, 무엇보다 우리가 최근 심심찮게 듣곤 하는 그 폭력을 고스란히 재연한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격한 장면들도 제법 있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모두 실제 폭력을 재연한다. 처음 나는 이 터무니없이 과격한 사실적 영화에 제법 놀랐다.

영화를 만든 방송반 친구들의 이야기는 명쾌했다. 그 아이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마치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라도 된 것처럼 그 아이들의 악은 사회구조의 탓이라고 따지는 여중생들의 불안한 목소리에 훨씬 못 미치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거꾸로 우리는 폭력적인 여중생들의 인격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악을 증언하고 고발하며 이를 근절하고 처벌하겠다는 의지로 발버둥을 친다.

엄벌주의라는 발작적인 소동을 걱정스럽게 헤아리는 목소리가 많다. 다들 일리 있게 들린다. 부정의를 일삼는 ‘정의의 화신’인 사법기관에 대한 분노가 엄벌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나타난다는 것도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범죄는 더 이상 행동이 아니라 그것을 저지른 개인의 인격 자체라고 확신하면서 범죄자를 괴물로 간주하는 것, 즉 타인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오늘날의 엄벌주의의 은밀한 배경이라는 지적 역시 설득력 있다. 그러나 법률이 정한 처벌에 만족하지 못한 채 더 큰 벌을 내리도록 요구하는 욕망을 헤아려보는 것 못잖게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떨쳐지는 것은 아니다.

수십년간 폭력은 악의 화신으로 등극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폭력이란 누군가가 타인에게 가한 상해와 위협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그것은 거의 자연적인 사실처럼 여겨지는 진짜 폭력에 대해 눈감는다. 성폭력은 끔찍하지만, 자신의 꿈과 사랑을 실현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육아와 요리, 몸매 관리 따위는 눈곱만큼의 폭력도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정신 나간 모리배 같은 고용주의 폭력에 대해서는 증오를 쏟아내지만 보다 많은 성과를 내겠다고 열광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폭력에 시달린다고 생각하는 일은 거의 없다.

구조적 폭력, 객관적인 폭력이라고 부를 만한 이러한 폭력은 오늘날 자연상태처럼 되었다. 그러한 자연상태로서의 폭력에 시달리는 세계는 자신의 고통과 원한을 처분할 적을 찾으려 생생하고 투명한 악인 주관적 폭력의 주인공에게 집착할 것이다. 저항할 수 없는 폭력, 심지어 자신의 내밀한 욕망처럼 여겨지는 구조의 압력에 허덕일 때, 우리는 그 원망을 폭력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맹렬한 분노로 이체한다. 그럴수록 더욱 해결될 수 없는 구조적 폭력의 효과는 이자처럼 불어날 것이다. 무섭고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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