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7.10.27 17:56 수정 : 2017.10.27 19:02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책장에 꽂혀 있던 박경리의 <일본산고(日本散考)>(2013)를 우연히 발견하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생전에 작가가 ‘일본 문제’에 대해 발표한 산문들을 모은 것이다. 대하소설 <토지>의 완간 전후에 쓴 것과 1993년 전후에 쓴 글들이 묶여 있다. 스무살이 될 때까지 작가 자신이 일본 식민주의 체제 아래에서 살았기 때문에, 식민지 체험 세대의 ‘일본론’이라는 관점에서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고 나는 생각했다.

수록된 산문들의 갈피에서 언젠가 체계적인 ‘일본론’을 저작의 형태로 쓰겠다고 결심하는 저자의 음성을 듣기도 했다. 아쉽게도 그 결심은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해서, 이렇게 흩어져 있던 원고들이나마 편집자에 의해 묶인 것이 다행스럽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박경리의 일본론 혹은 일본 비판이 매우 예리하다고 느꼈다. 식민지 체험 세대라 그렇겠지만, <일본서기>나 <고사기> 등을 분석적으로 비판하고 해체하는 관점은 날카로웠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소설로 쓴 일본론’이라 작가가 피력했던 대하소설 <토지>도 새로운 독법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편 다음과 같은 문장, 즉 “근대사조가 일본으로 밀려들어 온 후 특기할 만한 현상의 하나로 문인들의 빈번한 자살사건을 들 수 있다”는 지적은 골똘히 음미해볼 문제로 여겨졌다. 박경리는 세계문학사를 일별해볼 때, 메이지유신으로부터 채 100년이 안 되는 시기에 그렇게 많은 문인이 자살한 것은 일본 빼고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낭만파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기타무라 도코쿠, 지순한 감정의 시인 이쿠타 ?게쓰, 소설가로서는 가와카미 비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아리시마 다케오는 물론 전후의 미시마 유키오까지, 자살 문인의 목록은 자못 길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자살이 아니더라도 ‘지연된 자살’과 유사한 하이쿠 작가 마사오카 시키의 폐결핵, 그의 친우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위궤양 등 기타 죽음의 목록은 즐비한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이나 <산시로>의 등장인물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이 범람하는 자살과 죽음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이런 질문을 에로티시즘, 그로테스크, 난센스라는 당대의 일본 풍속사에 한정하지 않고, 사상사의 관점에서 던진 게 박경리의 예리함이었다.

그렇다면 이 범람하는 문인들의 자살을 해명할 수 있는 답은 무엇인가. 박경리는 ‘만들어진 신화’에 해당되는 만세일계, 신도 사상, 칼의 문화 등이 결합되어 초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인 국체(國體) 관념이 위로부터 강제되었고, 여기에 질풍같이 밀려드는 외래사상의 범람 속에서 일본의 문인들이 사상의 좌표를 찾지 못해 압사당한 것이 아니겠냐는 가설을 제기하고 있다. 요컨대 근대 일본문학의 탐미주의 또는 예술지상주의라는 과잉은 현실을 논리적·사상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응전력의 상실에서 온 원인이자 결과로 나는 이해했다.

이런 분석을 펼친 후에 박경리가 역설하는 것은 “문화란 삶을 위해 있는 것이며 연속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자살을 선택했던 일본의 작가들은 “반문화적 테두리 속에 갇혀진 예술가”가 아니었던가 하고 박경리는 자문한다. ‘삶을 위한 예술’이란 박경리의 문학 개념은 명료하고 울림이 크다. 진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크리틱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