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지난 칼럼에서 독자들이 “타인의 자아표현과 접촉하는 것”에 대해 “불쾌”를 느낀다는 문학평론가 김미정의 진술에서 ‘산뜻한 충격’을 받았다고 쓴 바 있다. 나는 여전히 시와 소설, 평론과 산문을 읽으면서, 타인의 자아표현을 접하는 데서 오는 뜻밖의 감흥과 감정이입의 파장이 크고 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정념이나, 요즘 흔히 쓰는 정동이랄지 하는 일본식 번역어가 지시하는 마음의 복합적 움직임이 작품 읽기를 지속하게 하고, 또 그것에 만족감과 의미를 부여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한 출판사에서 나온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서늘함을 체험했다. 한 권은 시집이었고, 다른 한 권은 산문집이었다. 고뇌나 상처가 깊고 내밀할수록 무표정은 생활인의 쓸 만한 가면이 된다. 그러니까 시집과 소설집, 산문집이란 생활인의 무표정 안쪽에 숨어 있는 생기 있는 맨얼굴이다.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그 혹은 그녀의 봉인된 정념과 사유가 느닷없이 내 쪽을 향하여 풀리는 듯한 낯섦에 빠지곤 한다. 이종형의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을 읽다가, 나는 시적 자아가 억제해왔던 유년의 고통이랄지 가족사에 깃든 뻐근한 통증이랄지 하는 것이 4·3이나 베트남 전쟁 등 역사적 비극과 유려하게 깍지 끼고 있는 은유적 풍경을 엿보았다. 시인 김해자의 산문집 <시의 눈, 벌레의 눈>을 읽으면서는, 백무산·송경동·황규관이 공유했던 노동문학이 이제는 개별적으로 분광되어버린 시대적 의미를 확인하는 것과 함께, 노동자 시인 육봉수의 죽음 같은 시를 처음 발견하기도 했다. 김해자는 그의 시를 설명하면서 “강자의 법 앞에 놓인 자벌레 같은 노동자”란 문장을 쓰고 있는데, “자벌레”의 움직임을 연상해보다가 나는 자못 씁쓸한 감정에 빠지기도 했다. 문학작품에서의 성숙한 자아표현은 직정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고, 노골화되기보다는 절제되어 있으며, 드러나기보다는 감추어져 있기에 슬며시 엿보인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독자 편에서 언어의 틈을 향해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기 전까지 작품은 의미의 미결정 상태에 놓여 있다. 어떤 작품이 독자로부터 열광적인 쾌/불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작품 속의 자아표현 때문만은 아니다. 독자 자신의 자아가 그것과 만나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럴 때 작품은 일단 생기와 의미를 얻는 듯하다. 그러나 작품 바깥의 현실을 보면, 우리들은 또 다른 형태의 자아표현들을 만나게 된다. 일상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된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 많은 언어는 쾌에 봉사하기도 하고, 불쾌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런데 에스엔에스에서의 쾌/불쾌의 문제는 가령 문학작품에서의 그것과는 상이한 층위에 있는 것 같다. 일단 자아표현이 직접적이고 노골화되기 십상이며, 표현되고 있는 언어가 유저(사용자)의 실제 목소리로 간주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에서는 ‘시적 자아’ ‘서술자=화자’ ‘등장인물’ 등으로 간접화되어 있는 ‘허구적 자아’ 개념이 에스엔에스에는 부재한다. 혹은 부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 보니 플랫폼 내부의 언어를 인격화된 주체의 육성으로 오인하는 경향이 더 크고 격렬하게 쾌/불쾌를 초래하는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에스엔에스 안의 자아라는 것 역시 진술이 선별·편집되고, 구성되고, 때로는 전시된다는 점에서 ‘허구적 자아’에 가깝다.
칼럼 |
[크리틱] ‘허구적 자아’의 효용 / 이명원 |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지난 칼럼에서 독자들이 “타인의 자아표현과 접촉하는 것”에 대해 “불쾌”를 느낀다는 문학평론가 김미정의 진술에서 ‘산뜻한 충격’을 받았다고 쓴 바 있다. 나는 여전히 시와 소설, 평론과 산문을 읽으면서, 타인의 자아표현을 접하는 데서 오는 뜻밖의 감흥과 감정이입의 파장이 크고 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정념이나, 요즘 흔히 쓰는 정동이랄지 하는 일본식 번역어가 지시하는 마음의 복합적 움직임이 작품 읽기를 지속하게 하고, 또 그것에 만족감과 의미를 부여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한 출판사에서 나온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서늘함을 체험했다. 한 권은 시집이었고, 다른 한 권은 산문집이었다. 고뇌나 상처가 깊고 내밀할수록 무표정은 생활인의 쓸 만한 가면이 된다. 그러니까 시집과 소설집, 산문집이란 생활인의 무표정 안쪽에 숨어 있는 생기 있는 맨얼굴이다.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그 혹은 그녀의 봉인된 정념과 사유가 느닷없이 내 쪽을 향하여 풀리는 듯한 낯섦에 빠지곤 한다. 이종형의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을 읽다가, 나는 시적 자아가 억제해왔던 유년의 고통이랄지 가족사에 깃든 뻐근한 통증이랄지 하는 것이 4·3이나 베트남 전쟁 등 역사적 비극과 유려하게 깍지 끼고 있는 은유적 풍경을 엿보았다. 시인 김해자의 산문집 <시의 눈, 벌레의 눈>을 읽으면서는, 백무산·송경동·황규관이 공유했던 노동문학이 이제는 개별적으로 분광되어버린 시대적 의미를 확인하는 것과 함께, 노동자 시인 육봉수의 죽음 같은 시를 처음 발견하기도 했다. 김해자는 그의 시를 설명하면서 “강자의 법 앞에 놓인 자벌레 같은 노동자”란 문장을 쓰고 있는데, “자벌레”의 움직임을 연상해보다가 나는 자못 씁쓸한 감정에 빠지기도 했다. 문학작품에서의 성숙한 자아표현은 직정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고, 노골화되기보다는 절제되어 있으며, 드러나기보다는 감추어져 있기에 슬며시 엿보인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독자 편에서 언어의 틈을 향해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기 전까지 작품은 의미의 미결정 상태에 놓여 있다. 어떤 작품이 독자로부터 열광적인 쾌/불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작품 속의 자아표현 때문만은 아니다. 독자 자신의 자아가 그것과 만나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럴 때 작품은 일단 생기와 의미를 얻는 듯하다. 그러나 작품 바깥의 현실을 보면, 우리들은 또 다른 형태의 자아표현들을 만나게 된다. 일상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된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 많은 언어는 쾌에 봉사하기도 하고, 불쾌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런데 에스엔에스에서의 쾌/불쾌의 문제는 가령 문학작품에서의 그것과는 상이한 층위에 있는 것 같다. 일단 자아표현이 직접적이고 노골화되기 십상이며, 표현되고 있는 언어가 유저(사용자)의 실제 목소리로 간주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에서는 ‘시적 자아’ ‘서술자=화자’ ‘등장인물’ 등으로 간접화되어 있는 ‘허구적 자아’ 개념이 에스엔에스에는 부재한다. 혹은 부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 보니 플랫폼 내부의 언어를 인격화된 주체의 육성으로 오인하는 경향이 더 크고 격렬하게 쾌/불쾌를 초래하는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에스엔에스 안의 자아라는 것 역시 진술이 선별·편집되고, 구성되고, 때로는 전시된다는 점에서 ‘허구적 자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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