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학교 교수·대중문화 평론가 2년 가까이 몇달에 한 번 꼬박꼬박 오던 ‘음악 엽서’가 올해 들어 오지 않는다. 사실 ‘음악 엽서’라는 것은 나의 상상일 뿐이고 실물이 있는 게 아니다. 장필순이 2015년 4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소길화(花)’라는 제목 아래 디지털 싱글로 발표한 10개의 곡이다. ‘소길’이라는 지명이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기 훨씬 전의 일이다. 엽서가 끊긴 이유는 이 곡들이 하나의 음반(앨범)으로 묶여 나오기 때문이다. 이 음반에 대해 ‘가수 장필순의 8집 앨범’이라고 말하는 것은 건조하다. 오히려 하나음악이라는 예전 이름, 그리고 푸른곰팡이라는 최근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곳의 집단 작업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어떤 곳’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곳을 지칭할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인데, ‘기획사’ ‘프로덕션’ ‘레이블’ 등은 사업체라는 느낌이 강해서 적절치 않다. 집단이라는 말도 그 뉘앙스가 뻐근하다. 이곳은 꽤 오래전부터 ‘공동체’라고 불려 왔고, 본인들도 이에 대해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혹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공동체가 ‘특별히 하는 일 없는’ 곳이라는 점도 더 이상 비밀은 아니다. 이 말이 ‘마냥 놀고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한 기획이나 프로그램을 따라 작업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것은 사족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 그리고 이곳과 연관된 사람들을 접할 때마다 <무위(無爲)의 공동체>라는 프랑스 철학자 장뤼크 낭시의 오래된 책 제목을 떠올리곤 했다. 그 공동체가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라는 물리적 장소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음반의 작업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은 이곳 어딘가에서 거주하는 가수 장필순과 프로듀서 조동익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적, 조동희, 배영길, 이상순 등의 동료나 지인이 먼 곳(혹은 가까운 곳)에서 찾아와 작품(곡)을 남기거나 악기를 연주한 음향을 남기고 갔다. 반년 전에 망자가 된 조동진도 두 곡에서 생전에 쓴 가사를 남겨 주었다. 이렇듯 어떤 곳이 공동체라는 이름에 부합한다면, 의외로 이질적인 사람들이 이리저리 이동하고, 교차하고, 조우하는 경우다. 즉, 공통성이란 공동체의 적이고, 공동체의 친구는 차이다. 그래서 이 음악의 정서는 ‘제주도에서의 공동체의 삶’이라는 말이 선사함직한 낭만과는 철저하게 다르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절박하고 치열한 감정들로 가득 찬 곡들도 있다. 그리움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표할 때마저 그 단어가 자아낼 법한 감상(感傷)을 최대한 제거하고자 한다. 어떤 경우든 그 노래들에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무언가 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담겨 있지 않다. 악기음이 인공적으로 들리고, 인공적인 전자음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도 왠지 이런 특징과 무관치 않게 들린다. 이런 윤리에 모든 사람이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이 글을 쓰는 사람도 예전에는 이런 윤리에 어느 정도는 의문을 가졌다. 아마도 ‘무언가 해야 할 것’이 많은 사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윤리를 새삼스럽게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특별히 함께 하는 일 없이 같이 있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게 개인이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인지, 사회가 전반적으로 변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무위의 공동체>를 집어 드니 공동체의 존재 근거로 ‘실존의 유한성’ ‘궁극적 혼자임’ ‘개인적 초월성’ 등의 단어가 출몰하고 경과한다. 흠….
칼럼 |
[크리틱] 무위의 공동체 음악: 장필순의 소길화 / 신현준 |
성공회대학교 교수·대중문화 평론가 2년 가까이 몇달에 한 번 꼬박꼬박 오던 ‘음악 엽서’가 올해 들어 오지 않는다. 사실 ‘음악 엽서’라는 것은 나의 상상일 뿐이고 실물이 있는 게 아니다. 장필순이 2015년 4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소길화(花)’라는 제목 아래 디지털 싱글로 발표한 10개의 곡이다. ‘소길’이라는 지명이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기 훨씬 전의 일이다. 엽서가 끊긴 이유는 이 곡들이 하나의 음반(앨범)으로 묶여 나오기 때문이다. 이 음반에 대해 ‘가수 장필순의 8집 앨범’이라고 말하는 것은 건조하다. 오히려 하나음악이라는 예전 이름, 그리고 푸른곰팡이라는 최근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곳의 집단 작업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어떤 곳’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곳을 지칭할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인데, ‘기획사’ ‘프로덕션’ ‘레이블’ 등은 사업체라는 느낌이 강해서 적절치 않다. 집단이라는 말도 그 뉘앙스가 뻐근하다. 이곳은 꽤 오래전부터 ‘공동체’라고 불려 왔고, 본인들도 이에 대해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혹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공동체가 ‘특별히 하는 일 없는’ 곳이라는 점도 더 이상 비밀은 아니다. 이 말이 ‘마냥 놀고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한 기획이나 프로그램을 따라 작업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것은 사족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 그리고 이곳과 연관된 사람들을 접할 때마다 <무위(無爲)의 공동체>라는 프랑스 철학자 장뤼크 낭시의 오래된 책 제목을 떠올리곤 했다. 그 공동체가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라는 물리적 장소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음반의 작업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은 이곳 어딘가에서 거주하는 가수 장필순과 프로듀서 조동익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적, 조동희, 배영길, 이상순 등의 동료나 지인이 먼 곳(혹은 가까운 곳)에서 찾아와 작품(곡)을 남기거나 악기를 연주한 음향을 남기고 갔다. 반년 전에 망자가 된 조동진도 두 곡에서 생전에 쓴 가사를 남겨 주었다. 이렇듯 어떤 곳이 공동체라는 이름에 부합한다면, 의외로 이질적인 사람들이 이리저리 이동하고, 교차하고, 조우하는 경우다. 즉, 공통성이란 공동체의 적이고, 공동체의 친구는 차이다. 그래서 이 음악의 정서는 ‘제주도에서의 공동체의 삶’이라는 말이 선사함직한 낭만과는 철저하게 다르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절박하고 치열한 감정들로 가득 찬 곡들도 있다. 그리움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표할 때마저 그 단어가 자아낼 법한 감상(感傷)을 최대한 제거하고자 한다. 어떤 경우든 그 노래들에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무언가 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담겨 있지 않다. 악기음이 인공적으로 들리고, 인공적인 전자음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도 왠지 이런 특징과 무관치 않게 들린다. 이런 윤리에 모든 사람이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이 글을 쓰는 사람도 예전에는 이런 윤리에 어느 정도는 의문을 가졌다. 아마도 ‘무언가 해야 할 것’이 많은 사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윤리를 새삼스럽게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특별히 함께 하는 일 없이 같이 있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게 개인이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인지, 사회가 전반적으로 변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무위의 공동체>를 집어 드니 공동체의 존재 근거로 ‘실존의 유한성’ ‘궁극적 혼자임’ ‘개인적 초월성’ 등의 단어가 출몰하고 경과한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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