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3.23 23:08
수정 : 2018.03.23 23:10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폭넓게 중국의 사상과 문학을 점검해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몇 지식인의 저작들은 시간이 나는 대로 검토해왔다. 가령 왕후이·왕샤오밍·쑨거 등이 쓴 저작들을 읽기도 했고, 몇몇 심포지엄에서는 그들의 발언을 경청한 적도 있다. 나는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사상사적 작업의 차별성과 함께, 한 가지 공통점에 대해 흥미를 느낀 바가 있다. 단순한 문제다. 이들의 전공은 중문학이며, 학위논문의 대상이 공히 루쉰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루쉰은 중국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도 이육사에 의해 소설 <고향>이 일찍이 번역된 바 있고, 그의 사후에는 추도문이 발표되는 등 한국문학과도 관련이 깊다. 일본에도 루쉰은 잘 알려져 있는데, 이를테면 쑨거와 같은 중국 지식인이 관심을 갖고 있는 다케우치 요시미 같은 이는 전전(戰前) 일본에서 <루쉰>(1943)을 출간한 바 있다. 이후에도 루쉰을 경유한 중국 인식, 동아시아 연구는 지속되고 있다. 한국 역시 그런 사정은 유사해 보인다.
나 역시 루쉰의 소설과 산문을 읽는 것을 즐기는 편인데, 그러다 보니 현대 중국 작가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선입견인지는 몰라도 작품에서 ‘아큐형 인물’의 흔적이 종종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위화의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독자에게도 잘 알려진 <허삼관 매혈기>나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가랑비 속의 외침> 등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루쉰의 영향을 진하게 느꼈다. 따라서 위화 역시 선배 작가 루쉰을 다른 중국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존중하고, 루쉰 문학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을 줄 예단했다.
그런데 위화의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2012)를 읽으니 사정은 그 반대임을 알 수 있었고, 나는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위화는 작품을 쓰면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루쉰을 경멸 내지는 혐오하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책의 ‘루쉰’이란 산문에서 위화의 고백적 진술을 읽으면서, ‘정신의 격투’란 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요는 위화가 초등학교부터 고교 시절까지 온몸에 상흔을 새겨야 했던 문화대혁명의 비극과 루쉰이 관계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국어 교과서에는 루쉰의 문학과 마오쩌둥의 시사(詩詞)만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이는 루쉰의 반봉건·반제국주의적 격투가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엉뚱하게도 문화대혁명을 정당화하는 ‘관제문학’으로 주입되어 신화화되는 아이러니를 낳았다는 것이다.
위화에 따르면, 문화대혁명은 ‘문학이 없는 시대’였는데, 마오쩌둥과 루쉰만이 문학으로 간주되어 반혁명분자를 숙청하는 근거로 기능하는 일이 일상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흔의 시대를 겪은 위화였기 때문에, 중국문학이 관제화의 족쇄에서 마침내 해방되었을 때, 자신으로서는 루쉰을 흔쾌히 긍정한다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산문의 끝에서 위화는 시간이 흘러 루쉰의 문학을 그것 자체로서 이해하게 되었고, 자신의 소설에 그의 문학이 끼친 내밀한 영향을 인정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흔쾌한 인정은 아니다. 거기에는 긍정과 혐오의 양극화된 복합감정이 내면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루쉰의 문학은 누구의 것인가. 마오쩌둥의 것인가. 루쉰 자신의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깊은 상흔을 간직한 위화의 것인가. 혹은 위화가 처한 상황적 맥락을 전혀 모른 채 읽고 있었던 나와 같은 이들의 것인가. 정신의 격투가 불가피한 문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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