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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3.30 18:45 수정 : 2018.03.30 19:24

신현준
성공회대학교 교수·대중문화 평론가

지난 주말인 3월22일부터 25일까지 어떤 학술회의 발표자로 출장을 다녀왔다. 그 학회를 다녀온 또 하나의 학자인 천정환이 자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올린 표현을 빌리면 “제국(워싱턴디시)에서 열리는 AAS(미국아시아학회) 연례 학술회의”다. 대형·주류·메이저, 학술 이벤트라서 여기 참여한다는 건 부끄러울 건 없어도 자랑스러울 것도 없다. 무엇보다도 ‘아시아’에 대한 지식의 생산과 소통을 ‘미국에서 영어로’ 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다. 진보적, 심지어 급진적 주장을 취하는 데 제약은 없지만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그렇다고 해도 올해 학술회의가 인상적이었다면, 조한혜정이 저 학술회의의 기조연설자였다는 점이다. <한겨레>에 오랫동안 칼럼을 쓴 바로 그분 맞으니 그를 소개하는 것이 오히려 실례다. 그동안 이 학회의 기조연설자 대부분이 일본·중국·인도 등 아시아 대국들의 남성 학자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비판적인 여성 학자가 기조연설자로 선정된 것은 무언가 징후적이다.

연설 제목은 “세대, 재접속, 상호성: 동아시아 청년 프레카리아트 연합전선의 희망”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내용을 상세히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그녀가 평소 <한겨레> 칼럼에 썼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그 주장에 대해 나는 이의는 조금 있지만 비판적이지는 않다). 이 점도 내게는 이례적이었는데, ‘해외한국학’의 현장에서 ‘코리아’가 관심을 끄는 경우는 일제의 식민지배, 냉전과 분단, 권위주의 정권과 민주화운동 등 크고 무거운 주제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이야기들 대부분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여러 발표장에서 보고 들은 한국인 혹은 한국계 젊은 연구자들의 발표였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에서 학부를 마치고 미국(정확히 말하면 북미)으로 유학을 간 뒤 그곳의 대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우들이다. 즉, 그곳 학계에서 교육받고 자리를 잡은 경우도 아니고, 잠시 유학을 다녀온 뒤 한국 학계에 자리잡은 경우도 아니다. 요는 한국 사회나 문화의 참신한 면모에 대해 섬세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왜 제국의 학계에 기여하고 있느냐’는 질문은 부적절하다. 미국에서 ‘아시아 여성’이라는 이중의 소수자가 백인 남성의 헤게모니 아래서 얼마나 힘들게 투쟁하는지에 대해서도 내가 가진 실감이 크지는 않다. 분명한 게 있다면 그들이 한국에 돌아왔다면 이렇게 연구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냉혹한 물질적 현실이다. 그랬다면 ‘일용직’ 시간강사나 ‘비정규직’ 연구교수를 전전했을 확률이 더 크다.

이걸 두고 ‘미국식(혹은 제국식) 마켓 페미니즘(market feminism)’이라고 평할 사람도 있겠지만(최근 그와 관련된 책이 한 권 번역되었다), 그런 평은 왠지 날이 무뎌 보인다. 차라리 나를 포함한 ‘중년 남성 지식인’이 작금의 젠더 혁명의 상황에서 진지하게 사유할 문제는 ‘적절할 때 적절한 자리로 물러나는 것’이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작금의 ‘진보적 남성의 도덕적 공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 아닐까.

이 혁명에 이의는 있을 수 있어도 비판은 있을 수 없다. ‘물러난다’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 소소한 실천을 하자’는 제안이다. 그래서 이번 학회를 다녀온 뒤 나는 ‘한국현대문화사’ 등의 제목을 단 ‘필생의 대작’을 영어로 쓰겠다는 오래된 야망을 비로소 완전히 접었다. 한국 남성의 정신승리의 서사는 차고도 넘치니 말이다. 늦은 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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