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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12 20:34 수정 : 2018.10.13 11:34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내 고향 서울은 만인의 타향이다. 그러므로 서울에 고향을 건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뜨내기일 뿐이다.” 작가 김훈의 음성이 가슴을 후빈다.

부산에서 났지만 백일을 갓 넘겨 서울로 이주했으니 내 고향도 서울이라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누가 고향을 물으면 “부산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자랐다”고 답한다. 서울과 고향 사이에 등호를 넣는 게 불편하다.

서울로 올라온 부모님은 참 이사를 많이 다녔다. 주민등록초본을 떼보니 스물다섯개의 주소가 찍혀 있다. 2년에 한번꼴로 이사를 다닌 셈이다. 덕분에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동네에서 거대 도시 서울의 변화와 발전을 역동적으로 경험하며 성장했다.

내가 서울을 고향이라 말하지 못하는 건 단지 유목민 같은 이사의 역사 때문일까. 아마 거주한 장소의 수보다는 그곳들에 대한 기억의 상실이 고향의 부재를 낳았을 것이라는 잠정적 답안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고향은 공간이기보다는 시간일 것이다.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른다. 유형의 물체가 아니어서 붙잡을 수도 없다. 시간의 흐름을 되돌리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의 힘을 빌려 시간의 역류를 꿈꾼다. 기억은 시간의 방향을 거스를 수 있다는 기대감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고향, 그것은 곧 기억이다.

초록의 산야보다 아스팔트 주차장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원조 아파트 키드지만, 나에게도 여러개의 파편으로 조합된 장소의 기억들이 남아 있다. 그런 단편적 기억의 콜라주가 그나마 나의 고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향의 매개체인 장소의 기억들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바뀌고 사라진 도시가 서울이다.

연 날리던 들판이 롯데월드가 된 건 이미 오래전 일이다. 스릴 넘치는 화약 놀이 카니발이 열리던 공터는 로데오 거리가 됐고, 총천연색 만국기 아래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빈 땅엔 타워팰리스가 들어섰다. 장소의 기억이 물리적으로 소멸되면 상실감으로 이어진다. 이제 시간을 거스르기 위해, 기억의 파편을 경험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침대에 누워 아이패드를 두 손가락으로 벌리고 오므리기를 반복하며 옛 지도와 위성사진을 들여다보는 일뿐이다.

내 기억의 콜라주에서 가장 강렬하고 생생한 한 조각은 요즘 한창 말 많고 탈 많은 잠실주공 5단지다. 1970년대 말 유년기의 4년을 보낸, ‘획일적인 판상형 고층 아파트 단지’의 원조인 이곳은 40년 전 형체 그대로 간신히 수명을 연장해가고 있다. 지난주에는 이 기억의 현장을 30년 만에 다시 가볼 기회가 생겼다. 출장 동행자와의 차편 약속을 잠실 5단지 입구에서 한 것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콩닥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단지 순환도로를 천천히 걸었다. 30개 동의 무표정한 아파트 건물엔 녹물이 흘러내리지만, 10층 높이보다 더 자란 나무들이 자신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우중충하게 늘어져 있지만, 4000세대의 1만명 아이들이 뛰놀던 텅 빈 주차장은 삼중으로 뒤섞인 자동차들로 아수라장이지만, 단지 곳곳에 “서울시장은 재건축 약속을 이행하라”는 현수막이 펄럭이지만, 아이패드 화면으로는 절대 재생될 수 없는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기억, 그것은 시간의 역류를 꿈꾸는 반역 행위다.

서둘러 단지를 떠나며 시세 총액 8조원에 달하는 이곳 재산권자들이 들으면 뭇매 맞을 만한 생각에 휩싸였다. “다행이다. 기억을 상실한 도시 서울에서 내 유년의 물리적 흔적이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어서, 참, 다행이다.” 얼마 후면 흔적 없이 사라질 기억의 마지막 풍경.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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