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니스트 성장영화는 대체로 미성년인 주인공이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과정을 다룬다. 성장영화에 담긴 정신적 성숙 과정이라는 보편성 때문에 다양한 세대의 관객들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처한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시각적 모티브나 사건들로 인해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대의 관객들은 더욱 구체적인 기억을 되살리고 그 시기를 떠올리게 된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1994년을 배경으로 강남의 한 아파트 상가에서 떡집을 하는 부모와 사는 15살 여중생 은희의 일상을 담는다. 아버지는 학력이 변변치 못하지만 떡집을 해서 경제적으로는 부족하지 않다. 그렇지만 손님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에 분개하고, 자식들은 자기보다 더 좋은 교육을 받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강북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보다는 연애에 관심 많은 큰딸을 다그치고, 중3인 아들에게 반드시 대원외고에 갈 것을 종용한다. 아들은 부담을 느끼면서도 차마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은희도 간접적으로 압력을 느끼지만 역시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내키지는 않지만 집 근처의 한문학원에 다니는데, 어느 날 담당 선생님이 남자에서 김영지라는 여자 선생님으로 바뀐다. 가정과 학교에서 무시당하는 은희는 자기를 존중해주는 김 선생님을 흠모하고 의지하게 된다. 이 영화는 1994년에 일어난 주요한 사건들을 언급한다. 수술을 받느라 병원에 입원한 은희는 텔레비전으로 김일성 사망 뉴스를 본다. 은희에게 뉴스에 나오는 통곡하는 북한 주민들은 낯선 이미지일 뿐이고, 뉴스를 보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은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은 얼마 뒤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다. 은희의 언니 수희는 그 시간에 성수대교를 지나는 버스를 놓쳐 사고를 면하지만 그 버스에 타고 가다 죽은 친구들을 애도하면서 큰 충격을 받는다. 2010년대 들어 영화 <건축학개론>과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와 같이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대중문화 텍스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해서 일시적으로 레트로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작품들은 대체로 그 시절 등장했던 피시(PC)통신과 전람회, 에이치오티(HOT), 젝스키스, 서태지와 같은 대중음악 스타들을 활용함으로써, 그 시대를 표현하는 지표로 삼는 동시에 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 시기에 온라인상에서 대중문화의 본격적인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1980년대가 군부독재로 점철되었던 데 비해 민주화가 진전된 1990년대에는 탈정치적인 성격이 부각되고 이른바 소비주의와 신세대론이 등장했던 것을 고려하면, 그런 설정의 등장이 이해할 만했다. 그렇지만 이 작품들은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1990년대 주요 사건은 다루지 않았다. 이제는 중년이 된 주인공들과 그 또래 관객들의 찬란했던 젊은 시절로 1990년대를 그린다. 이전 한국영화는 분단과 독재, 민주화를 다루었는데 <벌새>는 1990년대 이후의 공적인 사건들을 다룸으로써 586세대 이후 세대들도 자기 경험에 입각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94년 15살이었던 은희는 1997년에 외환위기와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목격했고, 20대가 되어서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보며 길거리 응원에 나섰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은희는 2019년 현재 거의 마흔살이 되었다. 과연 은희는 여전히 김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을지, 그리고 요즘 일련의 사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칼럼 |
[크리틱] ‘벌새’, 성장영화와 1990년대 / 노광우 |
영화칼럼니스트 성장영화는 대체로 미성년인 주인공이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과정을 다룬다. 성장영화에 담긴 정신적 성숙 과정이라는 보편성 때문에 다양한 세대의 관객들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처한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시각적 모티브나 사건들로 인해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대의 관객들은 더욱 구체적인 기억을 되살리고 그 시기를 떠올리게 된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1994년을 배경으로 강남의 한 아파트 상가에서 떡집을 하는 부모와 사는 15살 여중생 은희의 일상을 담는다. 아버지는 학력이 변변치 못하지만 떡집을 해서 경제적으로는 부족하지 않다. 그렇지만 손님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에 분개하고, 자식들은 자기보다 더 좋은 교육을 받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강북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보다는 연애에 관심 많은 큰딸을 다그치고, 중3인 아들에게 반드시 대원외고에 갈 것을 종용한다. 아들은 부담을 느끼면서도 차마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은희도 간접적으로 압력을 느끼지만 역시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내키지는 않지만 집 근처의 한문학원에 다니는데, 어느 날 담당 선생님이 남자에서 김영지라는 여자 선생님으로 바뀐다. 가정과 학교에서 무시당하는 은희는 자기를 존중해주는 김 선생님을 흠모하고 의지하게 된다. 이 영화는 1994년에 일어난 주요한 사건들을 언급한다. 수술을 받느라 병원에 입원한 은희는 텔레비전으로 김일성 사망 뉴스를 본다. 은희에게 뉴스에 나오는 통곡하는 북한 주민들은 낯선 이미지일 뿐이고, 뉴스를 보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은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은 얼마 뒤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다. 은희의 언니 수희는 그 시간에 성수대교를 지나는 버스를 놓쳐 사고를 면하지만 그 버스에 타고 가다 죽은 친구들을 애도하면서 큰 충격을 받는다. 2010년대 들어 영화 <건축학개론>과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와 같이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대중문화 텍스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해서 일시적으로 레트로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작품들은 대체로 그 시절 등장했던 피시(PC)통신과 전람회, 에이치오티(HOT), 젝스키스, 서태지와 같은 대중음악 스타들을 활용함으로써, 그 시대를 표현하는 지표로 삼는 동시에 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 시기에 온라인상에서 대중문화의 본격적인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1980년대가 군부독재로 점철되었던 데 비해 민주화가 진전된 1990년대에는 탈정치적인 성격이 부각되고 이른바 소비주의와 신세대론이 등장했던 것을 고려하면, 그런 설정의 등장이 이해할 만했다. 그렇지만 이 작품들은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1990년대 주요 사건은 다루지 않았다. 이제는 중년이 된 주인공들과 그 또래 관객들의 찬란했던 젊은 시절로 1990년대를 그린다. 이전 한국영화는 분단과 독재, 민주화를 다루었는데 <벌새>는 1990년대 이후의 공적인 사건들을 다룸으로써 586세대 이후 세대들도 자기 경험에 입각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94년 15살이었던 은희는 1997년에 외환위기와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목격했고, 20대가 되어서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보며 길거리 응원에 나섰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은희는 2019년 현재 거의 마흔살이 되었다. 과연 은희는 여전히 김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을지, 그리고 요즘 일련의 사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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