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도시계획이 한국 정치 최전선의 쟁점으로 떠오른 적이 있다. 불과 얼마 전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는 청와대와 중앙부처를 충청권으로 옮기는 수도 이전이었다. 수도권 과밀 해소와 국토 균형발전을 목표로 한 이 공약은 참여정부 첫해부터 빠르게 실천됐다. 2003년 말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이 통과됐지만 큰 저항에 부닥친 끝에 바로 이듬해에 위헌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변경된 사업이 2005년부터 다시 추진되면서 각종 계획이 동시에 진행됐다. 2007년 첫 삽을 뜬 지 불과 12년 만에 세종시는 인구 34만명이 거주하는 도시로 자라났다. 세종시는 여느 신도시 못지않은 속도전으로 건설됐지만, 다양한 도시 이념이 실험되고 다층의 전문 지식이 실천된 진보적 도시계획의 산물이기도 하다. 중앙의 장남평야 일대를 완전히 비우고 그 주변에 도시 기능을 환상형으로 배치하는 실험적 구상이 계획 초기의 도시개념 국제공모에서 채택됐다. 이러한 파격이 기본계획에도 반영돼 7㎢(약 210만평)의 광대한 공지가 도시 한가운데 배치됐다. 세종시가 지향한 비위계적, 탈중심적, 민주적 도시 구조의 기반은 바로 중앙부의 텅 빈 땅이다. 운 좋게도 나는 몇몇 동료와 함께 축구장 800개 넓이의 수평적 경관으로 도시 정체성을 직조하는 경관계획에 참여했다. 연이어 우리는 도시 진화의 매개체가 될 대형 공원을 광활한 대지에 계획하는 국제공모전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당시의 계획 지침 한 대목을 옮긴다. “중앙녹지공간은 도시 경관과 환경의 중추가 될 녹색 심장이며 미래 성장의 바탕이다. 도시로부터 격리된 소극적 공원을 넘어, 소통과 생성을 통해 도시와 대화하는 역동적이고 시민 친화적인 장소로 성장해갈 것이다. … 중앙녹지공간은 열린 접근과 과정 중심적 설계를 통해 도시의 성장과 함께 지속적으로 발전해가는 유연하고 다기능적인 공간이 될 것이다.” 희망과 흥분이 교차하는 문장에는 이론으로만 꿈꾸던 ‘공원이 만드는 도시’를 실현할 수 있다는 기대가 깔려 있지만, 긴장과 불안도 공존한다. 도시를 비우는 실험이 과연 개발과 건설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2007년 8월, 반년간의 치열한 2단계 경쟁 끝에 신진 조경가 노선주 팀의 ‘오래된 미래’가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국내외의 브랜드 디자이너들을 물리친 이 당선작은, 금강변 제방을 허물어 물과 뭍의 경계를 유연하게 하고 산과 강을 향해 경관을 열며 생산적 공원과 수평적 농경지를 하나로 엮어 도시 진화의 바탕을 만드는 구상을 펼쳤다. 12년이 흘렀지만 ‘오래된 미래’는 여전히 미지의 진행형이다. 제방을 허무는 안은 우여곡절 끝에 철회됐고, 주변 토지이용계획의 변경에 따라 공원 부지가 계속 잠식됐다. 국립수목원이 계획됐고 박물관 단지가 들어왔다. 드넓은 생산 경관이라는 핵심 개념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2011년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금개구리가 발견된 이후에는 환경단체와 시민모임이 공원 조성을 두고 대립하고 있다. 도시 중앙의 거대한 빈 땅이 세종시의 미래를 이끌 경관 매개체로 작동될 수 있을까. ‘공원이 만드는 도시’는 가능한 것인가. 다음주에 열릴 ‘세종학포럼’에서 발제를 맡아달라는 초대에 덜컥 응하고 말았다. 주어진 원고 제목은 ‘공원과 도시의 새로운 관계 만들기: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실험과 그 이후’다. 며칠째 옛 실험의 흔적들을 소환하며 추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삶의 일상과 공원이 맺는 관계가 풍요로울 때 ‘공원이 만드는 도시’는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이 한 문장밖에 쓸 수 없을 것 같다.
칼럼 |
[크리틱] 공원이 만드는 도시 /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도시계획이 한국 정치 최전선의 쟁점으로 떠오른 적이 있다. 불과 얼마 전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는 청와대와 중앙부처를 충청권으로 옮기는 수도 이전이었다. 수도권 과밀 해소와 국토 균형발전을 목표로 한 이 공약은 참여정부 첫해부터 빠르게 실천됐다. 2003년 말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이 통과됐지만 큰 저항에 부닥친 끝에 바로 이듬해에 위헌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변경된 사업이 2005년부터 다시 추진되면서 각종 계획이 동시에 진행됐다. 2007년 첫 삽을 뜬 지 불과 12년 만에 세종시는 인구 34만명이 거주하는 도시로 자라났다. 세종시는 여느 신도시 못지않은 속도전으로 건설됐지만, 다양한 도시 이념이 실험되고 다층의 전문 지식이 실천된 진보적 도시계획의 산물이기도 하다. 중앙의 장남평야 일대를 완전히 비우고 그 주변에 도시 기능을 환상형으로 배치하는 실험적 구상이 계획 초기의 도시개념 국제공모에서 채택됐다. 이러한 파격이 기본계획에도 반영돼 7㎢(약 210만평)의 광대한 공지가 도시 한가운데 배치됐다. 세종시가 지향한 비위계적, 탈중심적, 민주적 도시 구조의 기반은 바로 중앙부의 텅 빈 땅이다. 운 좋게도 나는 몇몇 동료와 함께 축구장 800개 넓이의 수평적 경관으로 도시 정체성을 직조하는 경관계획에 참여했다. 연이어 우리는 도시 진화의 매개체가 될 대형 공원을 광활한 대지에 계획하는 국제공모전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당시의 계획 지침 한 대목을 옮긴다. “중앙녹지공간은 도시 경관과 환경의 중추가 될 녹색 심장이며 미래 성장의 바탕이다. 도시로부터 격리된 소극적 공원을 넘어, 소통과 생성을 통해 도시와 대화하는 역동적이고 시민 친화적인 장소로 성장해갈 것이다. … 중앙녹지공간은 열린 접근과 과정 중심적 설계를 통해 도시의 성장과 함께 지속적으로 발전해가는 유연하고 다기능적인 공간이 될 것이다.” 희망과 흥분이 교차하는 문장에는 이론으로만 꿈꾸던 ‘공원이 만드는 도시’를 실현할 수 있다는 기대가 깔려 있지만, 긴장과 불안도 공존한다. 도시를 비우는 실험이 과연 개발과 건설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2007년 8월, 반년간의 치열한 2단계 경쟁 끝에 신진 조경가 노선주 팀의 ‘오래된 미래’가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국내외의 브랜드 디자이너들을 물리친 이 당선작은, 금강변 제방을 허물어 물과 뭍의 경계를 유연하게 하고 산과 강을 향해 경관을 열며 생산적 공원과 수평적 농경지를 하나로 엮어 도시 진화의 바탕을 만드는 구상을 펼쳤다. 12년이 흘렀지만 ‘오래된 미래’는 여전히 미지의 진행형이다. 제방을 허무는 안은 우여곡절 끝에 철회됐고, 주변 토지이용계획의 변경에 따라 공원 부지가 계속 잠식됐다. 국립수목원이 계획됐고 박물관 단지가 들어왔다. 드넓은 생산 경관이라는 핵심 개념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2011년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금개구리가 발견된 이후에는 환경단체와 시민모임이 공원 조성을 두고 대립하고 있다. 도시 중앙의 거대한 빈 땅이 세종시의 미래를 이끌 경관 매개체로 작동될 수 있을까. ‘공원이 만드는 도시’는 가능한 것인가. 다음주에 열릴 ‘세종학포럼’에서 발제를 맡아달라는 초대에 덜컥 응하고 말았다. 주어진 원고 제목은 ‘공원과 도시의 새로운 관계 만들기: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실험과 그 이후’다. 며칠째 옛 실험의 흔적들을 소환하며 추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삶의 일상과 공원이 맺는 관계가 풍요로울 때 ‘공원이 만드는 도시’는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이 한 문장밖에 쓸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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