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15 17:43
수정 : 2019.11.16 02:32
김영준ㅣ열린책들 편집이사
직장 생활을 해본 사람 중에 윗사람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두번이라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안 보는 것 같아도 다 보고 있다. 여기 앉아 있으면 다 보인다.” 이 말은 들을 때마다 새삼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정작 내 쪽에서는 얼굴도 보기 힘든 사람이 언제 나를 들여다본다는 걸까?
1. 직급이 높아지면 자동적으로 신비스러운 천리안을 갖게 된다. 2. 회사나 경영의 구조가 푸코가 말하는 파놉티콘(다 들여다보이는 원형 감옥)처럼 짜여 있다. 3. 마키아벨리가 <군주론> 서문에 썼듯 “산(군주)의 모습은 평지(인민)에서 봐야 알 수 있고 평지의 모습은 산에서 봐야 안다.” 즉 직원의 진실은 관리자만 알 수 있다. 4. 애초에 신기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그저 높은 곳에 있으면 ‘너희들’에 대한 정보가 다양한 경로로 모여든다.
아마 어느 정도는 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윗사람이 부모 같은 어조로 경솔한 자식을 타이르듯 “다 보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에는 뭔가 매혹적이고 죄의식을 자극하는 지점이 있다. 이젠 회사를 직접 경영하는 과거의 동료로부터 저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이지만, 속으로 왜 나는 이 나이를 먹도록 “다 보기”는커녕 갈수록 팀원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느낌밖에 갖지 못하는지 답답해지면서, 이게 어떤 인간들에게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깨달음의 영역인가 자문해 보는 것이다.
그러다 얼마 전 갑자기 이게 무슨 얘긴지 알 것 같았다. 다 본다는 것은 숫자를 본다는 뜻이 아닐까. 합계와 평균, 최소값과 최대값, 증감률과 추세가 있는 숫자 말이다. 물론 회사에서 말하는 숫자란 실적을 의미한다. 문제를 너무 단순화하지 않기 위해 숫자 그 자체는 판단이 아니고, 언제나 해석이 요구된다는 말은 덧붙여야겠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한눈에 명료하게 파악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건 대개 숫자의 영역인 것이다.
이런 걸 고민하는 사람도 있다. 팀원에게 지난주까지 작성을 지시한 보고서를 왜 아직도 가지고 오지 않는지, 재촉을 해야 할 텐데 언제쯤 하는 게 적당할지, 오전에 보니 별로 표정이 좋지 않던데 오늘 얘기하는 게 과연 현명할지, 한다면 무슨 말투로 하는 게 효과적일지 등등. 이런 태도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런 식의 세심함은 진실을 낳지 않는다. 아니 내가 무슨 수로 타인의 사정과 진실을 알겠는가?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
무슨 카프카 소설처럼 골방에서 나오지 않고 조직과 개인의 실적만 들여다보고 있는 관리자, 그가 수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예컨대 그는 회사 분위기라든가 직원들 개인의 진실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살다 보면 우리는 각각의 진실들이 등가인 것이 아니고 우선순위에 따라 굴복시키고 굴복하는 관계임을 알게 된다. 이익을 내야 하는 조직에서 단 하나만 챙긴다면 무엇이어야 할지는 분명하다. 조직을 접지 않고 지속시킬 이유가 아닐까. 적어도 골방의 관리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알고, 그것을 이미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높은 사람이 실제로 모든 것을 다 내려다보고 있을 리는 없다는 상식적인 관점으로 되돌아간다. 단지 그가 나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진실까지 못 보는 건 아닌데, 나의 진실이란 그의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어떤 숫자인 것이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나의 진실이지 나 자신은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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