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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05 18:37 수정 : 2006.09.05 15:33

중앙식당의 성게보말국

머리 비우고 마음 채워준 제주도의 맛

한겨울, 제주도에서 15일 정도 묵은 적이 있다. 주로 놀고 먹었다. 책도 몇 권 챙겨갔지만 손도 대지 않았다. 쭉 놀고 먹었다. 저녁이 되면 다음날 어디 가서 뭘 먹고 놀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겨울 바다는 아름다웠고, 음식은 맛있었다. 천년 역사를 간직한 비자림의 싱그런 공기를 마신 다음 후식으로 자리물회를 먹었고, 지삿개로 불어닥치는 짭짜름한 바닷바람을 맛본 다음 슴슴한 전복죽으로 입안의 균형을 맞추었다. 계속 먹고 놀았더니 머리 속이 텅, 비어갔다. 그게 좋았다. 머리 속을 포맷(format)한 느낌이었다. 머리를 다시 회전시키기만 하면 위대한 생각이 옥돔처럼 팔딱거리며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15일 동안 먹고 놀면서 수많은 식당을 다녔다. 인터넷이나 잡지에서 알게 된 식당의 음식은 대체로 맛있었고, 제주도 사람들이 추천해 준 식당의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신기한 법칙이었다. 그 중에서도 ‘석요’라는 도예원에서 추천해준 모슬포항의 ‘덕승식당’(064-794-0177)은 현지인이 아니고선 도저히 추천해줄 수 없는 곳이었다. 겉모습을 보나 실내를 보나, 항구 주변의 흔하디 흔한 밥집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허름하고 비좁았다. 하지만 주인 아주머니의 음식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된장을 푼 쥐치매운탕의 단아한 뒤끝이나 옥돔조림의 풍성한 질감은, 재료를 이해하고 존중했을 때에야 가능한 맛이었다. 15일 동안 제주도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드나들었지만 모든 음식의 맛이 그랬다. 양념은 적게 쓰고 재료의 맛은 최대한 살린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산방산 근처의 ‘중앙식당’(064-794-9167)은 덕승식당에 비해 규모만 좀 클 뿐 허름하긴 매한가지다. 이 집 역시 언뜻 보면 그냥 동네 밥집이다. 이 집을 설명하기 위해선 ‘성게보말국’을 빼놓을 수 없다. 성게보말국의 그 맛은, 정말이지, 뭐랄까, 도저히, 설명을 못하겠다. 내 머리와 혀는 분명히 그 맛을 기억하고 있는데, 말로 하자니, 답답하다. 성게의 구수한 맛과 보말의 쌉싸래한 맛이 신선한 제주도의 미역과 어우러지면서…, 말을 말자. 맛있다는 말밖에 할 게 없다.

15일의 놀고 먹는 휴가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로 쌓여 있었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다시 일을 했다. 일을 하고 일을 했다. 가끔은 자리, 한치, 소라로 만든 물회가 먹고 싶었고, 덕승식당의 쥐치매운탕이 먹고 싶었고, 중앙식당의 성게보말국이 먹고 싶었지만, 잘 참고 일을 했다.

제주도에서 먹었던 음식들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아련해진다. 그리고 짧은 순간, 머리 속이 시원해진다. 그 음식들을 생각하는 순간, 어쩌면 내 몸은 평화로웠던 그 시절 15일간의 휴가를 기억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머리 속 밑바닥에 놓여 있는 맛과 향의 기억을 끄집어낸 다음 먼지만 툭툭 털어내면 잠깐이나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기억의 힘으로 버티는 게 한계에 이르렀을 무렵, 다시 제주도에 갔다. 이번엔 봄이었다. ‘아, 중앙식당의 성게보말국은 이렇고 이런 맛이었지’라고 늘 머리 속으로 생각했는데, 다시 가서 먹어보니, 그대로였다. 그대로여서 전보다 더 맛있었다. 그 날 저녁 덕승식당에 갔더니 아주머니는 고기가 떨어졌다며 미안한 얼굴로 근처 다른 식당을 소개해 줬다. 하마터면 울 뻔했다. 결국 덕승식당의 음식은 먹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도 내 마음은 제주도로 향하고 있다.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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