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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30 10:15 수정 : 2019.12.01 14:44

건강이 안 좋은 캐롤 셸비(맷 데이먼·왼쪽)와 사회부적응 성격을 가진 켄 마일스(크리스천 베일)는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레이싱 우승을 향해 질주한다. 두 주인공이 대화를 하며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20세기폭스 예고편 화면 갈무리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포드 v 페라리>

승전국 여운 돌던 60년대 미국
포드 인수 제안 거절한 페라리
‘페라리 이겨라’ 특명 받은 그들

레이싱에 미친 두 주인공의 열정
포드 ‘성과주의’ 반기 들며 질주
CG 배제하고 실제 레이싱 촬영

건강이 안 좋은 캐롤 셸비(맷 데이먼·왼쪽)와 사회부적응 성격을 가진 켄 마일스(크리스천 베일)는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레이싱 우승을 향해 질주한다. 두 주인공이 대화를 하며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20세기폭스 예고편 화면 갈무리

‘포드 v 페라리’(포드 대 페라리). 여기에서 v는 ‘포드 vs 페라리’의 오기(誤記)가 아니다. 물론 ‘브이 포 벤데타’의 고유명사 v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v가 뜻하는 바가 victory(빅토리·승리)일 것임은 거의 30㎝ 자의 길이만큼이나 자명하겠으므로, 이 제목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정보들이 거의 자동으로 파악된다. ‘①소재: 자동차와 자동차 경주, ②국적: 미국(최소한 이탈리아 영화가 아닌 것은 확실), ③줄거리 및 결말: 포드가 페라리를 이김.’

더구나 이 영화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여 제목만으로도 이미 영화를 본 듯한 기분이 든다. 대략 이런 줄거리의. ‘포드 시스템을 통해 바퀴 달린 냉장고를 대량 찍어내던 미국 포드가, 레이싱카 제작 및 카레이싱에서는 절대적 우위에 있던 이탈리아 페라리를 꺾고 기적의 승리를 거뒀던 어느 레이스 및 그 기적을 실현해낸 인물들에 관한 감동 실화.’ 게다가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60년대다. 그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여운과 그 달콤한 과실의 잔향이 여전히 미국 전역에 떠돌던 시기다. 반면 이탈리아는 추축국 중 하나로 연합군에 패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둘 때, 페라리 수장 엔초 페라리가 거액을 싸 들고 온 포드의 인수 제안을 마지막 순간에 거절하고, 포드의 임원들을 ‘쓰레기들’, 총수인 헨리 포드 2세(트레이시 레츠)를 ‘뚱뚱보’라고 칭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넌 헨리 포드가 아니야. 헨리 포드 2세지”라며 도발하는 대목은, 영화 속 대결을 카레이싱이나 산업 경쟁을 넘어 전쟁의 수준까지 밀어붙이려는 설정으로 볼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속 헨리 포드 2세는 집무실 창밖의 포드 공장을 내려다보면서, 유명 퇴역 카레이서이자 엔지니어인, 레이싱팀의 리더 ‘캐롤 셸비’(맷 데이먼)에게 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저 공장에서 미군 폭격기 5대 중 3대를 만들었어. 전쟁을 시작해!”

‘미국 대 이탈리아’의 가죽

자, 여기까지 본다면 <포드 v 페라리>는 영락없는 전미자동차산업연합회판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걸리는 브레이크가 하나 있다. 맷 데이먼, 크리스천 베일, 그리고 제임스 맨골드 감독, 이 세 사람의 이름이다. 맨골드 감독을 잘 모르더라도, 앞의 두 배우가 ‘미국 만만세!’ 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은 굳이 대단한 영화팬이 아니더라도 잘 알고 있는 바일 것이다(참고로, 맨골드 감독은 전작 <로건>에서만 하더라도 리무진 지붕 위로 몸을 내민 채 거리를 향해 “유에스에이!”를 부르짖는 여피들을 구역질 다분히 머금은 시선으로 묘사했다).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제목부터 실제 사연까지 ‘미국 만세’ 외에는 달리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영화에서 이 이름들이 목격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서는 두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에서 찾을 수 있다. 치명적인 건강 문제로 조기 은퇴한 카레이서 캐롤 셸비는 스포츠카 설계 및 판매로 생업을 바꿨지만 언제나 철마는 달리고 싶다. 결국 은퇴 전인 1959년, 24시간 내내 차를 돌리는 가혹한 레이스인 ‘르망 24시간’에서 우승했던 셸비의 경력은 그를 다시 카레이싱 판으로 불러들인다.

영국 출신 카레이서 겸 엔지니어 ‘켄 마일스’(크리스천 베일)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는 셸비를 대신해서 철마를 달리게 해 줄 인물이다. 그런데 건강이라는 치명적 약점이 있는 셸비처럼, 마일스에게도 만만찮은 약점이 있다. 윤활성과 유동성, 호환성이 매우 떨어지는 성격이라는 점 말이다. 정비소 사장으로서의 마일스는 제대로 된 아르피엠(RPM)에 맞춰 변속을 못 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손님을 무시하고 면박을 준다(정비소는 당연히도 망한다). 홀로 레이서로서의 마일스는 차 트렁크 크기 규정을 문제 삼은 대회 관계자에게 ‘당신 어릴 적 꿈이 그딴 허접한 일 하는 건 아녔을 거 아니냐?’라고 따진다(결국 그는 해머로 트렁크를 찌그러뜨려 규정을 통과한다). 포드 레이싱팀의 레이서로서 마일스는 포드의 머스탱 신차 발표회장에서 포드 중역인 ‘리오 비비’(조시 루커스)에게 머스탱이 얼마나 구린 차인지를 기술적 조언을 빙자해 청산유수로 설파한다(레이싱팀 담당이 된 부사장은 당연히도 마일스를 경기에서 제외한다).

그러니까, 차와 카레이싱에 미친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치명적인 약점, 즉 레이싱할 수 없는 건강 상태와 팀플레이를 할 수 없는 사회부적응 성격을 서로 보완하며 그야말로 2인3각 경주를 뛰어야 한다. 왜? 두 사람이 모두 똑같이 미쳐 있는 그것, 레이싱을 하기 위해서.

하여 이 경주에서 이들의 적은 페라리가 아니다. 이들의 진짜 적은 다름 아닌 포드다. 정확히는 이들 레이서에게 막대한 자금을 대며, 성과를 내지 못하면 지원을 끊겠다고 위협하는 총수 이하 포드의 수뇌부, 특히 총수인 포드 2세의 악어새가 되어 그 겨드랑이 밑에서 각종 아부와 정치를 하며 갑의 위용을 레이싱팀에게 떨치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부사장 리오 비비다. 이러한 영화의 입장은 머스탱 신차 발표회장의 연설대에 선 셸비가 “진정 해야 할 일을 아는 사람, 제가 알기론 둘뿐입니다. 저와 헨리 포드”라는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면서도 마일스에게 시선을 고정해 ‘헨리 포드’를 ‘켄 마일스’로 은밀히 대체하는 그 장면에서, 또는 영화 말미에서 마일스를 향해 모자를 들어 올려 경의를 표하는 엔초 페라리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짧고도 굵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제목으로는 사실 <포드 v 포드>가 훨씬 더 적합하겠다. ‘미국 대 이탈리아’의 가죽을 쓰고 있지만 실은 ‘개인 대 조직’의 영화이므로. 제어불능의 충동과 열의를 타고난 개인들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잡아야 하는 거대조직·자본이라는 고래 등에 올라타 어떻게 살아남고 어떻게 목적지까지 항해해 나가는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에 대한 영화이므로.

영화 말미에 엔초 페라리는 켄 마일스(크리스천 베일)를 향해 모자를 들어 올려 경의를 표한다. 영화는 ‘헨리 포드’를 ‘켄 마일스’로 은밀히 대체한다. 마일스가 트랙을 달리는 모습. 20세기폭스 예고편 화면 갈무리

포드의 적은 포드

그리고 바로 이 대목이 필시, 이 영화의 크레딧에서 크리스천 베일, 맷 데이먼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개인 대 조직의 이야기가 비단 포드와 카레이싱의 세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거대조직·자본과의 위태로운 춤을 아예 기본조건으로 안고 들어가는 영화 창작자들에게, 이들 카레이서의 이야기는 곧 자신들의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그러한 절절한 감정이입이 담긴 비유적 장면들이 실로 곳곳에서 등장한다. 특히나 이 영화의 진정한 하이라이트인, 결정적인 선택을 앞둔 켄 마일스의 옆모습을 잡은 클로즈업 롱테이크에서의 크리스천 베일의 연기는, 바로 그런 이해와 동병상련의 산물일 것이기에 불가사의할 정도로 깊고 강한 울림을 남긴다.

영화는 그러한 핵심을 잊지 않으면서도 (필시 북미시장에서의 흥행을 다분히 염두에 둔) 단기간에 페라리를 따라잡기 위해 셸비의 팀이 겪는 각종 우여곡절 및 사투를 위시해, 포드가 페라리를 꺾은 1966년 르망 24시간 대회를 거의 실시간 중계에 필적하는 생생함으로 알뜰히 보여준다. 특히 다수의 장면을 컴퓨터그래픽(CG)이 아니라 실제 레이싱카에 카메라를 장착해 찍는 구식 방식으로 연출된 레이싱 장면은, 제2차 세계대전 영화의 전투기 공중전 장면을 연상케 할 정도로 긴박하다. 레이싱 장면에서의 이러한 구식(이지만 전혀 늙어 보이지는 않는) 연출이 주는 실물감은 앞서 말한 이 영화의 기본적인 대결구도(제2차 세계대전의 연장)를 생각하면 충분히 타당해 보이는데, 덕분에 영화는 음속 기록에 도전하는 미국의 테스트 파일럿들과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의 첨병이 돼버린 우주비행사들을 그린 걸작 <필사의 도전>(The Right Stuff)까지 언뜻언뜻 떠올리게 한다.

물론 로버트 맥키적 원칙에 충실한 이 영화가 달성한 속도와 시야가, <필사의 도전>이 도달한 고도 그리고 그를 통해 확보해 낸 넓고 깊은 시야까지 도달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나 <포드 v 페라리>가 이 영화의 거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마일스의 아내 ‘몰리’(카트리나 밸프)를 다루는 방식이나 분량, 마일스와 아들 ‘피터’(노아 주프)의 적잖이 도식적인 관계 묘사, 그리고 꽤 흥미로운 인물인 미국 자동차업계의 거물 ‘리 아이어코카’(존 번탈)에 대한 다소 밋밋한 묘사는 못내 아쉽다. 기왕 2시간32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인 마당에, 이들에게 좀 더 과감히 썼더라면 싶다.

하지만 어쨌든 <포드 v 페라리>에 올라탄 관객에게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실제보다 훨씬 짧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제는 디즈니 제국의 또 하나의 영지가 된 ‘20세기폭스’라는 고래 등에 올라탄 이 영화가 통과해야 했던 가장 중요한 체크포인트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도 <포드 v 페라리>는 확실하게 v하고 있다. 한동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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