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BAR
작은 것 버리고 큰 것 취하는 ‘탕평’
세력이 외로우면 조화 꾀하는 ‘협치’
참여정부 공과 돌아보는 ‘복기’ 등
문재인 정부 5년 시작 ‘첫돌’ 호평
“저는 바둑을 통해 인생을 배웠습니다. 정치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크게 보고, 멀리 내다보고, 전체를 봐야 합니다. 바둑에서 국지전의 승부에 집착하지 말고, 늘 반면 전체를 보면서 대세를 살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꼼수가 정수에 이길 수 없는 이치도 같습니다.”
(2016년 6월2일 문재인 대통령 페이스북- 책 <신의 한 수 인간의 한 수 78> 추천사 중)
“우리 세대는 어릴 적 동네에서 어르신들이 둘러앉아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어르신들이 두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배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성년이 된 뒤에는 <월간바둑>을 정기구독하면서 거기에 실린 기보를 복기하면서 연습했다. 조훈현 9단과 서봉수 9단의 대국을 많이 복기했던 것 같다. 2차 술자리는 잘 안 가는 스타일이고,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집으로 돌아와 기보를 보면서 명국을 복기해보곤 했는데, 그게 실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2012년 12월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 <일요신문> 인터뷰)
정치인들은 바둑을 사랑합니다. 반상(盤上)을 마주하고 침묵 속에서 치열한 수 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정치의 본질과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실제로 정치판과 정치 기사에선 ‘장고’, ‘악수’, ‘정치 9단’, ‘포석’, ‘수읽기’, ‘초읽기’ 등 바둑용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바둑애호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중학교 때 바둑을 시작해 아마추어 3단 정도 수준까지 갔는데, 청와대 들어간 이후 바빠서 돌을 잡지 못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저녁 약속이 없으면 집으로 돌아와 조훈현 9단이나 서봉수 9단의 대국을 복기하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둑에는 대국에 임하는 자세와 전략을 나타내는 ‘위기십결(圍棋十訣)’이라는 10가지 격언이 있습니다.
부득탐승(不得貪勝) : 승리를 탐하면 이길 수 없다
입계의완(入界宜緩) : 경계에 진입할 때는 신중해야 하다
공피고아(攻彼顧我) : 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나를 돌아보라
기자쟁선(棄子爭先) : 돌을 희생하더라도 선수를 잡아라
사소취대(捨小就大) :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봉위수기(逢危須棄) : 위기에 봉착하면 불필요한 것은 버려라
신물경속(愼勿輕速) :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대처하라
동수상응(動須相應) : 돌을 움직일 때는 주위의 돌과 호응해야 한다
피강자보(彼强自保) : 상대가 강한 곳에서는 우선 안전을 도모하라
세고취화(勢孤取和) : 세력 속에 고립되었을 때는 화평을 취하라
바둑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위기십결을 인생의 교훈으로 삼기도 합니다. 정치인의 자세와 전략도 위기십결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바둑애호가인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뒤 반상 위에서 어떤 ‘수’를 두었을까요? 앞으로 5년을 위해 어떤 포석을 놓았을까요. 위기십결로 문재인 정부의 일주일 포석을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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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당선 전인 지난해 7월29일 한국기원을 방문해 바둑 국가대표 상비군과 한국기원 연구생을 상대로 ‘나의 삶, 그리고 바둑’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문 대통령이 특강 뒤 박정환 9단(왼쪽)과 초반 20여수를 두는 모습. 가운데는 박치문 한국기원 부총재. 한국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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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취대(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차지함): 탕평 인사
문재인 대통령의 초기 인사에 대해 ‘탕평 인사’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호남 출신의 온건 성향인 이낙연 총리 후보자는 ‘탕평총리’로, 서훈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는 국정원 개혁에 대한 의지로, 임종석 비서실장 임명은 젊고 실무적인 청와대를 꾸리겠다는 의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뒤 청와대 참모진 인선에도 이른바 ‘친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외에도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을 임명했습니다. 서울·경기·영남·호남·충청 등 지역도 고르게 분산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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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국무총리와 국정원장, 비서실장, 경호실장 인선 발표를 하고 있다. 왼쪽 둘째부터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 서훈 국정원장 후보자, 임종석 비서실장.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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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인사’의 바탕에는 핵심 측근이라고 불리던 인사들의 ‘2선 후퇴’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대선 레이스에서 문 대통령 반대 진영에서는 ‘삼철’이 ‘제2의 문고리 3인방’이 될 거라고 공격했습니다. ‘삼철’은 양정철 전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전해철 최고위원, 이호철 전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의 이름 마지막 글자를 딴 말로, 이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취임 뒤 양 전 비서관과, 이 전 수석은 “새 정부 국정운영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 “정권 교체가 이뤄졌고, 제 할 일을 다한 듯하다. 자유를 위해 먼 길을 떠난다”는 의사를 밝히고 해외로 떠나거나 떠날 예정입니다. ‘친문’으로 꼽히는 최재성 전 의원도 백의종군을 선언했고, 정권 교체의 1등 공신으로 평가받는 김경수 의원도 국회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5일 양 전 비서관과 저녁 자리에서 “떠나겠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대통령이든 집권 이후 포부를 펼치기 위해 ’자기 사람’을 쓰고 싶어합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겠지만 측근들의 백의종군 선언은 문 대통령에게 집권 초기 ‘탕평 정부’라는 이미지를 국민과 여론에 각인시키는 성과로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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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취화(세력이 외로우면 화평하라): 협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뒤 치러진 대선에서 당선된 문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치 지형에서 청와대의 주인이 됐습니다. 과거 어느 정부보다 ’협치’의 필요성이 크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문 대통령은 10일 취임 선서식을 하기 전에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을 비롯해 4당을 방문하며 협치 행보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취임사에서는 “야당은 국정운영의 동반자이고 대화를 정례화하고 수시로 만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청와대와 국회·정당의 소통 창구 구실을 할 첫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에 전병헌 전 민주당 원내대표를 임명한 것에서 그의 의지가 읽힙니다. 전 정무수석은 3선 의원으로 원내대표까지 지낸 중진 정치인으로 온건 의회주의자로 분류됩니다. 국회와 대립을 이어간 박근혜 정부에서 존재감 없이 스쳐 간 정무수석들과 뚜렷이 대비되는 ’한 수’입니다. 청와대는 “국회를 무겁게 생각하고 소통하겠다는 대통령의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전 정무수석의 인선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전 정무수석은 15~17일 사흘 동안 각 당의 원내대표를 만나고 협치를 강조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19일에는 5당 원내대표와 만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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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왼쪽 둘째)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를 찾아 정우택 원내대표(오른쪽 둘째)와 악수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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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피고아(공격에 나서기에 앞서 먼저 나를 돌아보라): 권력기관 개혁
“우리가 정치적 중립성, 이 부분을 너무 나이브하게 생각했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정치적 중립성이 해결되면 그 틀 속에서, 말하자면 검찰의 민주화까지 따라온다고 생각했어요(중략). 정치적 중립에 대한 신뢰가 먼저 이루어져야만 그 뒤에 검찰권의 민주적 통제도, 국익에 따른 검찰권의 행사에 관한 논의도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검찰에게 정치적 중립만 보장해주면 나머지는 검찰이 알아서 개혁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국민주권주의가 확립된 지금은 국민이 직접권리를 가지고 권력기관을 통제해야 한다. 국민의 통제가 중심이 되지 않고 권력기관의 선의를 호소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오월의 봄. 2011년11월)> 중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검찰과 국정원 등 권력기관 개혁을 천명해왔습니다. 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준비해왔던 수를 하나씩 놓고 있습니다. 지난 11일 조국 신임 민정수석에게 ‘정윤회 문건 사건’의 진실을 박근혜 정권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검찰이 어떻게 은폐했는지 진상을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17일에는 법무·검찰 고위 간부들의 ‘돈 봉투 만찬’에 대해 고강도 감찰을 지시했습니다. 검찰 개혁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죠.
그런데 지금의 행보는 자신이 민정수석으로 재직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참여정부와 사뭇 다른 형태의 수입니다. 당시 참여정부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만 보장하면 검찰이 스스로 개혁할 것이라는 구상을 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직접 참여한 ‘평검사와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검찰 밑바닥에서부터 자체 개혁의 동력을 살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실패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2011년에 쓴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에서 참여정부의 실패를 뼈아프게 반성하고 검찰에 대한 국민의 통제를 강조했습니다.
이에 문 대통령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설치와 검경 수사권 조정 등 검찰 통제 방안을 검찰 개혁의 뼈대로 삼고 있습니다. 그 선봉에 비법조인 출신인 조국 교수를 내세운 것도 ‘국민과 사회의 검찰 통제’라는 문제의식이 반영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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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국 평검사와의 대화’를 열고 발언하고 있다. 노무현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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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쟁선(돌을 희생하더라도 선수(주도권)를 잡아라): 개혁조치
문 대통령은 10일 취임 뒤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임을 위한 행진곡’의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제창, 국정 역사교과서 폐지,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가동 중단, 세월호 참사로 숨진 기간제 교사의 순직 인정 등의 개혁조치를 잇달아 발표했습니다. 대선 때 내걸었던 공약들 가운데 대통령 지시나 시행령 개정으로 우선 가능한 것부터 속도감 있게 밀어붙이는 모습입니다. 이는 여소야대 국회에서 개혁입법을 통과시키려면 야당과 오랜 협상이 걸리는 것을 고려한 조치로 풀이됩니다. 개혁입법에 모든 힘을 쏟아붓다가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죠. 적폐청산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만큼 기대감이 높은 국민들에게 개혁의 바람을 보여주면서 앞으로의 국정운영 동력을 확보하려는 일종의 ‘주도권 잡기’로 보입니다. 주요 개혁과제들 추진을 뒤로 미루는 ‘작은 희생’을 하더라도 일단 주도권을 잡은 뒤에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의도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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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오전 인천공항공사 4층 CIP 라운지에서 열린 ‘찾아가는 대통령,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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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기: 참여정부와 대선 재수 경험
일주일로 새 정부의 전망을 평가하기는 다소 성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문 대통령의 최근 행보를 보면 참여정부와 대선 재수의 경험을 철저하게 복기한 노력이 엿보입니다. 실제로 그는 <1219 끝이 시작이다>, <문재인의 운명> 등 자신의 저서에서 참여정부와 대선 당시의 실패 원인을 상세하게 짚었습니다. 알파고와의 대결로 유명한 이세돌 9단은 대선 전인 5월6일 문재인 후보 티브이(TV) 지지연설에서 “문 후보는 4년 전 선거에 대한 복기를 잘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복기는 끝난 대국을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두면서 묘수와 문제수, 승부수 등을 살펴보고 다른 수는 없었는지 반성해보는 것으로 모든 바둑기사들은 복기로 실력을 갈고닦습니다. 복기에 매진한 문 대통령이 이제 앞으로 5년간 어떤 바둑을 보여줄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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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3일 봉하마을 방문객을 맞이하기 위해 사저 계단을 내려오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가운데), 주영훈 당시 경호부장(맨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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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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