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미스사이공>에서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이 1975년 4월30일 함락당할 때 미국 대사관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하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
[토요판] 조세영의 외교클럽
(16) 전쟁과 교민 철수
뮤지컬 <미스사이공>에서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이 1975년 4월30일 함락당할 때 미국 대사관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하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
2009년 3월15일 예멘에서 폭발사고로 한국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튿날 외교통상부 재외국민보호과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전쟁 등 재난시에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외교관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한겨레> 자료사진
|
북 대사관 폭도 습격 받아 위기
한국 대사관을 피난처로 제공
탈출 항공에 북 동포도 태워줘 재난때 교민 철수는 첫째 과제
예멘 내전때 교민 25명 철수령
독자 수단 없어 미국 등에 애걸
프랑스 호의로 막판 탈출 성공 4일째 되던 날도 하루 종일 돌아다녔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특히 철수인원이 많아서 하루에도 여러 대의 군용기를 투입하고 있는 미국 대사관에 대해서는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탑승이 어렵다는 대답뿐이었다. 서울의 외교부 본부가 워싱턴의 주미대사관을 통해서 미국 정부에 각별히 협조를 요청해 놓았다고 하는데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미국이 이 정도이니 규모가 작은 다른 대사관에서 도와줄 가능성은 더 적을 것 같아서 자포자기의 심정에 빠지기도 했다. 그날의 일기에는 ‘프랑스 대사관을 찾아가서 다시 한 번 철수 대상자 명단을 건네주었는데 그것을 받아드는 상대방의 표정에 정말 자존심이 상했다’고 적혀 있다. 지금은 그 사람의 얼굴조차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마음에 상처를 받았던 모양이다. 절실한 순간의 도움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으로부터 오는 법이라고 했던가. 저녁 6시쯤 프랑스 대사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내일 출발하는 비행기에 태워줄 테니 아침 6시 반까지 25명을 데리고 대사관으로 오라는 것이 아닌가. 그날 오후 프랑스 대사관에서의 불쾌했던 기억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워낙 여기저기 부탁을 하고 다녀서인지 이탈리아 대사관의 담당자까지 일부러 전화를 해서 내일 프랑스 대사관이 한국인 철수를 맡기로 했다고 알려주기도 했다. 고마웠다. 직원 가족들과 교민들에게 아침 일찍 출발할 준비를 하라고 해놓고 본부에도 전화로 보고를 했다. 며칠 동안 혼란이 계속된 상황이라 정말 예정대로 철수하게 되는 걸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밤 11시 반쯤 본부로부터 프랑스 외교부에 25명 철수에 대한 협조를 확인했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날 밤에도 두어 차례 계속된 대공포 소리에 놀라서 모두들 잠을 설친 채 아침 일찍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프랑스 대사관으로 출발했다. 전쟁터에 유일하게 들어온 <한겨레> 기자 가족을 떠나보내고 대사관으로 돌아오니 피로가 몰려왔다. 난생처음 남의 나라에서 전쟁을 겪게 되었고 위기상황에서 한국인 철수 업무를 처리했다. 밤낮없이 애를 태웠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러나 해외에서 한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최후의 보루가 바로 한국대사관이며, 그 일원인 나에게는 피하지 말고 감당해 내야 할 중요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괴롭고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다른 어떤 직업에서도 맛볼 수 없는 보람을 느꼈다. 예멘 내전을 겪으면서 외교부에 들어온 지 10년 만에 비로소 실기시험을 통과하고 제대로 된 외교관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멘에 부임했을 때부터 이미 남북의 양 세력 사이에 소규모 무력 충돌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어서 내전 발생의 가능성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내 나름대로 사람들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와 현지 신문에서 얻은 정보를 종합하여 부임 후 첫 번째 정세보고를 본부로 보냈다. 본격적인 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 결론이었는데, 보고 전문을 보낸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내전이 발생했으니 보기 좋게 망신만 당한 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피폐한 상황에서 내전이 일어나면 국내경제가 더욱 어려워지고 외국으로부터의 원조도 중단될 것이므로 남북 양측 모두 전면전은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했지만, 결국 전쟁은 일어났다. 전쟁이라는 행위 자체가 비합리적이듯, 전쟁이 일어나는 것 역시 비합리적이었다. 혼자 남은 대사관 직원 5명과 잔류를 선택한 교민 9명은 대사관 지하에서 합숙을 하며 지냈다. 본부와 외교전문의 송수신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전화나 팩스로 가끔씩 내전 상황을 보고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할 일이 없었다.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에는 항공편을 마련하느라 또 고생하지 말고 육로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로 탈출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휘발유와 비상식량을 대사관에 비축해 두었다. 당시는 아직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소식은 <시엔엔>(CNN) 티브이 뉴스나 단파라디오로 듣는 <비비시>(BBC) 뉴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철수한 가족들과의 유일한 연락수단인 국제전화도 좀처럼 연결이 쉽지 않았다. 내전이 시작되고 3주 정도 지난 5월29일 <한겨레>의 박찬수 기자(현 논설위원)가 한국 기자로는 처음으로 예멘에 들어왔다. 이집트에서 요르단을 거쳐 임시 항공편으로 사나 공항에 도착한 것이다. 박 기자는 합의 통일 후 4년 만에 내전으로 다시 분열의 위기를 맞은 예멘의 모습을 현지에서 취재해 6월1일부터 4일까지 3차례에 걸쳐 보도했다. 전쟁으로 외국인의 발길이 끊어진 상황에서 처음으로 입국한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대사관 직원과 교민들은 반가운 마음에 고국의 소식을 자세히 묻기도 하고, 박 기자가 떠날 때는 모두들 한국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귀국 후에 부쳐달라고 맡기기도 했다. 구구절절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쓰면서 전쟁의 경험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고 있음을 느꼈다. 다시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7월7일 내전이 종료되어 철수한 지 3개월 만에 가족들이 다시 예멘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1975년 4월 월남(남베트남)이 패망하기 직전 사이공의 한 건물 옥상에서 미군 헬기를 타고 탈출하는 사람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