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사드 배치 외에 북한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불순세력들을 철저히 가려내야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전형적인 ‘전짓불 언어’이다.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전짓불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 형체를 밝혀내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평등한 이유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무지하기 때문에 질문이 필요하고, 질문이 성찰을 낳아 무지에서 진리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질문이 그런 것은 아니다. 카네티는 “질문이 권력의 수단이 될 때 상대의 살을 도려내는 칼과 같다”고 했다. ‘카네티의 칼’은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에서 ‘전짓불의 공포’로 형상화되어 있다. 6·25가 터지고 경찰대와 공비가 뒤죽박죽으로 마을을 찾아들었던 어느 날 밤 경찰인지 공비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잠자고 있는 집으로 들이닥쳐 전짓불을 얼굴에다 내리비추며 누구의 편이냐고 묻는다. “어머니는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전짓불 뒤에 가려진 사람이 경찰대인지 공비인지를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절망적인 순간의 기억을,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가려 버린 전짓불에 대한 공포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질문은 그 자체가 칼로 변하는 권력의 언어이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의 네트워크로 자리 잡은 반공이데올로기는 억압적인 권력의 언어들을 끊임없이 생산해왔다. 반공이데올로기의 바탕은 ‘공산주의가 악’이라는 ‘절대적 진리’였고, 북한은 악의 구체적 모습이었다. 여기에 어긋나는 정보와 지식은 차단되거나 왜곡되었다. 언론과 지식인들은 허용된 정보와 지식만을 전달함으로써 진실을 불구화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파행적 역정은 국민의 정신을 끊임없이 불구화했던 반공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 사회라는 유기체는 사유의 역동 속에서 숨 쉰다. 사유가 역동적이지 못하면 사회의 생명력은 시든다. 반공이데올로기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사유의 역동성을 감금해왔다. 국가의 기본이념인 민주주의조차 반공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러한 반공이데올로기에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결실인 87체제와 1989년 11월의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것은 냉전체제가 무너졌음을 뜻하며, 냉전체제의 틀인 반공이데올로기가 무너졌음을 뜻한다. 이 문명사적 전환은 강고한 분단구조 속에 갇힌 한반도에 새로운 인식의 틀을 요구했다. 그 첫 번째 과제가 북한의 반미와 남한의 반공이라는 증오의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피였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작금의 한반도 정세가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부의 사드 배치 결정은 미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군사력 확장에 동참하여 북한·중국·러시아와의 공존을 포기하고 신냉전의 군사적 긴장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의사의 표현이다. 이 선택이 역사적 관점에서 커다란 후퇴로 보이는 이유는, 국제정세의 변화로 많은 부분에서 실효성을 상실한 반공이데올로기가 선택을 견인하였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 외에 북한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불순세력들을 철저히 가려내야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전형적인 ‘전짓불 언어’이다. 구조적 모순의 누적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위기, 브렉시트 이후 고립주의 경향의 흐름과 유럽의 불안, 미-중 갈등으로 긴장이 높아져가는 동북아 정세 등 요동치는 국제질서 속에서 국민의 안전에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는 대통령이 발설한 ‘전짓불 언어’는 절망스럽다 못해 공포까지 불러일으킨다. 미사일방어 역학에 정통한 테드 포스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 석좌교수는 “사드로 북한의 노동·스커드 미사일을 잡아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매뉴얼 패스트라이시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사드 배치는 워싱턴 디시(DC)의 타성에 젖은 싱크탱크의 잘못된 결정”이라며 “사드 배치로 무기경쟁이 가속화될 때 한국은 가장 큰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짓불 언어’와 다른 국내외 전문가들의 언어들이 소중한 이유는 ‘전짓불 언어’가 비추지 않는 곳을 비추기 때문이다. 메이저 언론들과 보수단체들이 대통령의 ‘전짓불 언어’들을 재생산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전짓불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 형체를 밝혀내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이다.
칼럼 |
[정찬, 세상의 저녁] 사드와 전짓불의 공포 |
소설가 “사드 배치 외에 북한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불순세력들을 철저히 가려내야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전형적인 ‘전짓불 언어’이다.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전짓불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 형체를 밝혀내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평등한 이유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무지하기 때문에 질문이 필요하고, 질문이 성찰을 낳아 무지에서 진리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질문이 그런 것은 아니다. 카네티는 “질문이 권력의 수단이 될 때 상대의 살을 도려내는 칼과 같다”고 했다. ‘카네티의 칼’은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에서 ‘전짓불의 공포’로 형상화되어 있다. 6·25가 터지고 경찰대와 공비가 뒤죽박죽으로 마을을 찾아들었던 어느 날 밤 경찰인지 공비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잠자고 있는 집으로 들이닥쳐 전짓불을 얼굴에다 내리비추며 누구의 편이냐고 묻는다. “어머니는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전짓불 뒤에 가려진 사람이 경찰대인지 공비인지를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절망적인 순간의 기억을,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가려 버린 전짓불에 대한 공포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질문은 그 자체가 칼로 변하는 권력의 언어이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의 네트워크로 자리 잡은 반공이데올로기는 억압적인 권력의 언어들을 끊임없이 생산해왔다. 반공이데올로기의 바탕은 ‘공산주의가 악’이라는 ‘절대적 진리’였고, 북한은 악의 구체적 모습이었다. 여기에 어긋나는 정보와 지식은 차단되거나 왜곡되었다. 언론과 지식인들은 허용된 정보와 지식만을 전달함으로써 진실을 불구화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파행적 역정은 국민의 정신을 끊임없이 불구화했던 반공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 사회라는 유기체는 사유의 역동 속에서 숨 쉰다. 사유가 역동적이지 못하면 사회의 생명력은 시든다. 반공이데올로기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사유의 역동성을 감금해왔다. 국가의 기본이념인 민주주의조차 반공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러한 반공이데올로기에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결실인 87체제와 1989년 11월의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것은 냉전체제가 무너졌음을 뜻하며, 냉전체제의 틀인 반공이데올로기가 무너졌음을 뜻한다. 이 문명사적 전환은 강고한 분단구조 속에 갇힌 한반도에 새로운 인식의 틀을 요구했다. 그 첫 번째 과제가 북한의 반미와 남한의 반공이라는 증오의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피였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작금의 한반도 정세가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부의 사드 배치 결정은 미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군사력 확장에 동참하여 북한·중국·러시아와의 공존을 포기하고 신냉전의 군사적 긴장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의사의 표현이다. 이 선택이 역사적 관점에서 커다란 후퇴로 보이는 이유는, 국제정세의 변화로 많은 부분에서 실효성을 상실한 반공이데올로기가 선택을 견인하였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 외에 북한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불순세력들을 철저히 가려내야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전형적인 ‘전짓불 언어’이다. 구조적 모순의 누적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위기, 브렉시트 이후 고립주의 경향의 흐름과 유럽의 불안, 미-중 갈등으로 긴장이 높아져가는 동북아 정세 등 요동치는 국제질서 속에서 국민의 안전에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는 대통령이 발설한 ‘전짓불 언어’는 절망스럽다 못해 공포까지 불러일으킨다. 미사일방어 역학에 정통한 테드 포스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 석좌교수는 “사드로 북한의 노동·스커드 미사일을 잡아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매뉴얼 패스트라이시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사드 배치는 워싱턴 디시(DC)의 타성에 젖은 싱크탱크의 잘못된 결정”이라며 “사드 배치로 무기경쟁이 가속화될 때 한국은 가장 큰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짓불 언어’와 다른 국내외 전문가들의 언어들이 소중한 이유는 ‘전짓불 언어’가 비추지 않는 곳을 비추기 때문이다. 메이저 언론들과 보수단체들이 대통령의 ‘전짓불 언어’들을 재생산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전짓불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 형체를 밝혀내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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