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집회의 군중들이 변화되지 않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세계,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전쟁 상태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은 그들에게 현재의 시선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는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공동체의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생명활동이다. 이분법적 세계에 갇혀 있는 군중을 지지 기반으로 삼는 정치인들과 정당의 모습이 추악하기까지 보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소설가 지난 1월21일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 총궐기대회’에서 한 스님이 태극기와 성조기 그림에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고 쓴 방패 모양의 피켓을 들고 연단에 올라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이 말은 진짜로 부처를 죽이라는 말이 아니다. 마치 부처처럼 정의를 부르짖는 짓거리를 하는 빨갱이를 죽이라는 얘기”라고 하면서 “북한에 핵 만들라고 퍼준 김대중 똘마니들, 북방한계선(NLL) 팔아먹은 노무현 똘마니 새끼들 중심으로 대통령을 탄핵시킨 국회를 때려 부숴야 한다. 이제 빨갱이들은 걸리는 대로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발언에 사회자는 “시원시원하죠?”라고 말했고, 집회 참가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이 스님은 2월9일 국회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 주최 ‘태극기 민심의 본질은 무엇인가’ 토론회에도 같은 피켓을 들고 참석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동양 선불교사에 큰 영향을 끼친 임제 선사의 법어다. 자신이 만든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에게 자유의 깨달음에 대한 법어를 기괴하게 비틀어 괴물의 언어로 만들어버린 참혹한 행위와, 그 행위에 환호하는 ‘노인 군중’의 모습을 어떤 마음으로 보아야 할까.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를 가리키는 비속어로 반공이데올로기의 중심 언어이다. 반공이데올로기의 근거는 공산주의의 악마성이었고, 북한은 악마성의 구체적 모습이었다. 반공이데올로기의 자양이 증오인 것은 북한의 악마성에서 연유한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 목적을 위해 교육은 보편성과 긍정성을 지향한다. 하지만 반공이데올로기 체제 속에서 이루어진 대한민국 교육은 오랫동안 특수성과 부정성을 지향했다. 공산주의자에 대한 증오를 주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악마성에 어긋나는 정보와 지식은 차단하고 왜곡하는 한편, 선택된 정보와 선택된 지식만을 전달함으로써 진실을 불구화했다. 불구화된 진실은 세계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세계를 비틀며 굴절시킨다. 그 결과 반공이데올로기의 틀에 갇힌 대한민국 교육은 인간을 괴물로 바꾸어버리는 기이한 마술이 되어버렸는데, 1950년대와 60년대에 초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북한 사람을 몸이 빨갛고 머리에 뿔이 난 괴물로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사회라는 유기체는 사유의 역동 속에서 숨 쉰다. 사유가 역동적이지 못하면 사회의 생명력은 시든다. 반공이데올로기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엄격히 제한함으로써 사유의 역동성을 감금해왔다. 사상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요체이다. 1919년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파업 촉구 전단 살포 사건 재판에서 “사상의 자유는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의 자유뿐 아니라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사상의 자유까지 보장하는 것”이라는 홈스 미 대법관의 견해는 민주주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이 본질이야말로 공산주의를 극복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권력자들은 진정한 반공에는 관심이 없었다. 반공이데올로기를 권력 강화의 도구로 이용했을 뿐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파행적 역정은 국민의 정신을 끊임없이 불구화했던 반공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했듯이, 역사의 관점에서 과거는 고정된 시간의 어떤 형태가 아니다. 현재의 시선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는 역동적인 생명체이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역사의 좀비가 되지 않으려면 현재의 시선에 의해 역동적인 생명체로 변화되어야 한다. 태극기 집회의 군중들이 변화되지 않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세계,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전쟁 상태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은 그들에게 현재의 시선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은 끊임없이 변한다. 정치는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공동체의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생명활동이다. 4차 산업혁명이 화두로 떠오르는 지금, 이분법적 세계에 갇혀 있는 군중을 지지 기반으로 삼는 정치인들과 정당의 모습이 추악하기까지 보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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