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3월10일 헌법재판소는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대통령 파면에 따르는 국가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고 밝히면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했다. 그 이후 국민의 관심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재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로 옮겨졌는데, 3월12일 저녁 청와대를 떠날 때까지 침묵하던 그녀는 삼성동 사저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민경욱 자유한국당 의원의 입을 빌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헌재의 선고를 못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 메시지는 ‘대통령에게 국가란 무엇이며, 국민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라는 지극히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물음을 떠올렸다. 국가라는 생명체가 박근혜의 삶 속으로 구체적으로 파고든 것은 1974년 어머니 육영수의 불의의 죽음으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당시의 유신체제는 국가를 박정희라는 한 개인에게 종속시켜버림으로써 민주주의를 매장했다. 허망한 가정이지만,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구축하지 않았다면 육영수와 그 자신의 비극적 죽음이 없었을 뿐 아니라, 다수의 국민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대통령으로 존경받았을 것이며, 1인 권력 체제하에서 누적되어온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폐해가 지금까지 이어져오면서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정말 필요한 시기에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압살한 것이다. 이런 기형적인 정치 체제 속에서 22세부터 27세까지 5년 동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박근혜의 내면에 국가와 국민이 어떤 모습으로 새겨졌을까? 삼성동 자택 앞에서 지지자들을 대하는 박근혜의 모습을 보면 그녀에게 국민이란 그녀가 어떤 짓을 해도 변함없이 지지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탄핵 인용 전에는 탄핵을 반대한 20% 내외의 사람들, 탄핵 인용 후에는 헌재 선고에 승복하지 않는 8% 내외의 사람들만이 국민인 것이다. 그러니 국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 재임 중에 박근혜가 저지른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행위들은 국민에 대한 두려움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헌재의 탄핵 인용에 대해 “한국의 젊은 민주주의가 훌륭하게 진화했음을 증명했다. 시민들은 대통령 퇴진뿐만 아니라 지난 수십년간 한국을 지배해온 정치 질서에 저항함으로써 구질서를 대표하는 박정희 체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의 잠재적 신호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이라고 평가하면서 “박정희 체제의 또 다른 유산인 ‘종북 프레임’도 흔들릴 것이다. 박정희가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용공 혐의를 덮어씌워 고문하고 억압했던 것처럼, 박근혜는 그를 반대하는 작가 수천 명에게 ‘종북’ 딱지를 붙여 블랙리스트로 관리했다. 이번 탄핵 인용으로 박정희 체제를 떠받쳐온 냉전 보수세력들은 압박을 받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대통령이 국민을 무서워하지 않았기에 국민이 스스로 일어나 민주주의의 원칙인 ‘주권재민’을 실천한 것이다. 외신들이 한국의 정치 변혁을 높이 평가한 데에는 평화로운 시위가 큰 역할을 했다. 시민들의 비폭력 저항 정신이 이룬 결실은 유신체제에서 전두환 체제에 이르는 독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여 민주주의를 일으킨 ‘젊은 영혼’들의 장엄한 희생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분들의 희생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를 대신한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친박단체’들이 집회에서 ‘탄핵 배후는 북한’이라면서 ‘계엄령 선포’를 주장한 것은 독재체제의 폭력시스템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짓밟음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국가의 주인에서 노예로 전락시켰다. 독재체제는 헌법 1조를 짓밟지 않고서는 성립이 불가능하다. 이 본질적 문제에 대해 한국의 보수 세력들은 성찰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박근혜 정부의 파탄이었다. 알베르 카뮈는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화국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발전은 ‘어제의 범죄’를 제대로 밝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박근혜 최순실의 범죄에 대해 검찰이 엄정하게 수사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칼럼 |
[정찬, 세상의 저녁] 전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생각 |
소설가 3월10일 헌법재판소는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대통령 파면에 따르는 국가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고 밝히면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했다. 그 이후 국민의 관심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재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로 옮겨졌는데, 3월12일 저녁 청와대를 떠날 때까지 침묵하던 그녀는 삼성동 사저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민경욱 자유한국당 의원의 입을 빌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헌재의 선고를 못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 메시지는 ‘대통령에게 국가란 무엇이며, 국민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라는 지극히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물음을 떠올렸다. 국가라는 생명체가 박근혜의 삶 속으로 구체적으로 파고든 것은 1974년 어머니 육영수의 불의의 죽음으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당시의 유신체제는 국가를 박정희라는 한 개인에게 종속시켜버림으로써 민주주의를 매장했다. 허망한 가정이지만,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구축하지 않았다면 육영수와 그 자신의 비극적 죽음이 없었을 뿐 아니라, 다수의 국민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대통령으로 존경받았을 것이며, 1인 권력 체제하에서 누적되어온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폐해가 지금까지 이어져오면서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정말 필요한 시기에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압살한 것이다. 이런 기형적인 정치 체제 속에서 22세부터 27세까지 5년 동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박근혜의 내면에 국가와 국민이 어떤 모습으로 새겨졌을까? 삼성동 자택 앞에서 지지자들을 대하는 박근혜의 모습을 보면 그녀에게 국민이란 그녀가 어떤 짓을 해도 변함없이 지지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탄핵 인용 전에는 탄핵을 반대한 20% 내외의 사람들, 탄핵 인용 후에는 헌재 선고에 승복하지 않는 8% 내외의 사람들만이 국민인 것이다. 그러니 국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 재임 중에 박근혜가 저지른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행위들은 국민에 대한 두려움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헌재의 탄핵 인용에 대해 “한국의 젊은 민주주의가 훌륭하게 진화했음을 증명했다. 시민들은 대통령 퇴진뿐만 아니라 지난 수십년간 한국을 지배해온 정치 질서에 저항함으로써 구질서를 대표하는 박정희 체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의 잠재적 신호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이라고 평가하면서 “박정희 체제의 또 다른 유산인 ‘종북 프레임’도 흔들릴 것이다. 박정희가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용공 혐의를 덮어씌워 고문하고 억압했던 것처럼, 박근혜는 그를 반대하는 작가 수천 명에게 ‘종북’ 딱지를 붙여 블랙리스트로 관리했다. 이번 탄핵 인용으로 박정희 체제를 떠받쳐온 냉전 보수세력들은 압박을 받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대통령이 국민을 무서워하지 않았기에 국민이 스스로 일어나 민주주의의 원칙인 ‘주권재민’을 실천한 것이다. 외신들이 한국의 정치 변혁을 높이 평가한 데에는 평화로운 시위가 큰 역할을 했다. 시민들의 비폭력 저항 정신이 이룬 결실은 유신체제에서 전두환 체제에 이르는 독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여 민주주의를 일으킨 ‘젊은 영혼’들의 장엄한 희생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분들의 희생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를 대신한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친박단체’들이 집회에서 ‘탄핵 배후는 북한’이라면서 ‘계엄령 선포’를 주장한 것은 독재체제의 폭력시스템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짓밟음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국가의 주인에서 노예로 전락시켰다. 독재체제는 헌법 1조를 짓밟지 않고서는 성립이 불가능하다. 이 본질적 문제에 대해 한국의 보수 세력들은 성찰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박근혜 정부의 파탄이었다. 알베르 카뮈는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화국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발전은 ‘어제의 범죄’를 제대로 밝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박근혜 최순실의 범죄에 대해 검찰이 엄정하게 수사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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