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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4.13 18:26 수정 : 2017.04.13 20:59

정찬
소설가

내가 대통령 선거에 처음 투표한 날은 1987년 12월16일이었다. 당시의 기억이 강렬했던 데에는 첫 투표라는 점도 있었지만 16년 만에 부활된 대통령 직선제라는 역사성이 더 큰 역할을 했다. 대통령 직선제가 사라진 것은 1972년 유신체제가 들어서면서였다. 한층 치열해진 반독재운동은 80년 광주항쟁을 계기로 질적으로 비약했다. 피의 정권, 진실의 무덤 위에 세운 부도덕한 정권과의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저항세력은 도덕적 분노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무기로 희생의 대열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희생들이 쌓이고 쌓여 이룩한 것이 87년 6월항쟁이다.

당시 많은 이들이 6월항쟁의 가장 큰 성과로 대통령 직선제를 꼽았다. 군부정권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민주진영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노태우 후보의 승리였다.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역사의 영혼들이 희생으로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탑이 정치인들의 권력욕으로 허물어진 것이다. 기득권을 잃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이들, 독재정권에 대한 거부감보다 변혁의 논리가 불러일으키는 심정적 불안에 싸인 이들, 반공이데올로기의 맹목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노태우 후보의 당선은 축복이었으나 그것이 한국사회에 미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5월 대선이 ‘촛불혁명’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87년 대선의 역사성과 겹친다. 4개월 동안 1600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한마음으로 외친 구호가 ‘이게 나라냐?’였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사익을 위해 행사한 대통령, 재난 대처에서 보여준 국가의 총체적 무능과 생명의 존엄에 대한 충격적 무감각, 소수를 위해 다수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사회체제의 구조적 악, 그러한 부조리와 적폐들에 기생하는 관료 정당 사법 검찰 언론의 타락한 권력에 대한 분노와 변화의 열망이 ‘이게 나라냐?’라는 함성에 응축되어 있었다. 이 간절한 함성이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냄으로써 조기 대선을 실현시켰다. 5월 대선의 역사성은 여기에 있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정부의 붕괴는 이명박 정부와 깊은 연관이 있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캠프가 ‘이명박 후보는 전과 14범’이라고 주장한 이후 그 말은 국민들에 회자되었다. 그럼에도 이명박이 대선에서 큰 차이로 당선된 것은 ‘내가 가진 땅과 주식이 좀 오르지 않을까, 세금 좀 덜 내지 않을까’ 하는 유권자들의 세속적 욕망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5년의 결과는 참담했다. 자원외교, 4대강 사업 등 잘못된 정책으로 나라를 빚더미에 올려놓았다. 특히 22조원이 투입된 4대강 사업은 생태계를 심대하게 파괴시켰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바로잡으려면 84조원이 든다는 전문가의 계산이 나왔다. 임기 5년 동안 권력실세들의 비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온 것은 사익을 철저하게 추구한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부를 이끈 집권여당은 선거에서 마땅히 국민의 심판을 받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가 당선된 것은 유권자들의 잘못된 선택이 빚은 재앙이었다. 박근혜와 최순실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이권 사업에 뛰어든 데에는 이명박 정권의 사익 추구가 엄청났음에도 대통령은 무사히 퇴임한 사실이 큰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박근혜의 탄핵과 구속을 역사적 등불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박근혜 정부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큰 역할을 한 세월호 선체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탄핵 인용 13일 후인 3월23일이었다. 반잠수식 선박에 올려진 세월호의 모습은 참혹했다. 배 바닥 부분의 파란색 페인트는 군데군데 벗겨져 녹이 짙게 슬어 있었고, 배 안의 기름이 흘러내린 곳은 검게 물들었다. 방향타가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있었으며, 깊은 상처 같은 구멍이 군데군데 뚫려 있었다.

세월호의 그런 모습이 한국사회의 참혹한 풍경을 비추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했다. 박근혜가 구속된 3월31일, 세월호는 마침내 뭍으로 올라왔다. 더는 나아갈 수 없을 만큼 약해진 상태였다. 선체가 휘어지고 뒤틀려 있는데다, 빠르게 녹이 슬고 있다. 5월 대선은 휘어지고 뒤틀리고 빠르게 녹이 슬고 있는 한국사회가 희망으로 나아가는 절호의 기회다. 유권자들은 5월 대선의 역사성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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