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6월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소설가 채영주다. 그가 숨을 거둔 것은 2002년 6월15일이었다. 향년 40. 월드컵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이 포르투갈을 꺾고 첫 16강에 진출함으로써 전국이 열기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그의 죽음은 여느 죽음과 달랐다. 사인은 위 무력증이었다. 아사(餓死)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위 무력증에 시달리나 그것으로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의사는 채영주에게 나타난 증상이 병리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해 정신과 치료를 권유했다. 한동안 정신과 전문의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앙드레 말로에게 문학은 운명을 소유하는 수단이었다. 덧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유효한 도구가 문학인 것이었다. 채영주에게 문학은 무엇이었을까? 2남2녀 중 막내였던 그는 공부를 무척 잘했다. 교사였던 양친이 막내에게 원한 것은 학자였다.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 때인 1984년 그는 양친의 소망대로 정치학자가 되기 위해 독일 유학을 준비했다. 유학 관련 시험을 하루 앞둔 8월 어느 날 주변과 연락을 끊고 잠적해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는 대전, 전주, 광주 등지를 떠돌며 익명의 존재가 되어 웨이터, 주방 보조, 빵공장 직공 등의 일을 하면서 자신의 삶과 전혀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 속에서 살았다. 그해 10월 부친의 병환 소식에 귀가하여 양친에게 학자의 길을 접고 소설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견고한 교육자 가풍 속에서 조형된 삶에 저항한 혁명적 일탈 행위이자 존재의 변신이었다. 채영주의 두 번째 일탈 행위는 1992년 결혼 직전에 일어났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잠적한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고 식장을 찾은 하객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그가 잠적한 가장 큰 이유는 1991년 3월 동남아시아 여행 도중 타이에서 만난 중국계 싱가포르 국적 여성 주채여(朱彩如)였다. 1993년 5월 채영주는 주채여와 결혼했다. 자기 속의 불확실성에 대한 환멸 때문에 누구도 책임 있게 사랑할 수 없었다던 그가 책임 있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의 세 번째 일탈이자 변신은 그전보다 한층 근원적이었다. 죽음보다 더 근원적인 일탈과 변신은 없다. 채영주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2002년 4월 초순이었다. 이사를 앞두고 그에게 전화했는데, 얼마 전부터 부쩍 약해진 위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다고 했다. 이사 후 집이 정리되면 초대하겠다는 나의 말에 그는 빨리 위가 좋아져 형수님이 차려주신 음식을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그렇게 홀연 떠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가 가족을 데리고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딸 스민이 아장아장 걸을 때였다. 나는 아내와 어린 딸을 향한 채영주의 한없는 사랑을 알고 있다. 딸을 이야기할 때는 꿈속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가 왜 굶어 죽었을까? 1988년 11월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단편 ‘노점사내’를 발표, 소설가의 길에 들어선 후 2002년 타계할 때까지 세권의 소설집과 다섯권의 장편소설을 펴내는 동안 그 흔한 문학상들이 모두 채영주를 비껴갔다. 그의 소설은 문학상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는 원고와 인세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전업작가였지만 대중성에 능숙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역하고 문학에 투신한 그에게 문학은 좀처럼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맑고 예민하고 엄격한 그의 영혼이 입은 상처와 절망의 깊이를 헤아릴 눈이 나에게는 없다. 카프카는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시간은 짧고 힘은 적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름답고 똑바른 삶이 불가능하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썼다. 그가 숨을 거둔 것은 마흔한번째 생일을 한달 앞둔 1924년 6월3일이었다. 카프카의 일기에서 내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나는 아직까지 결정적인 것을 쓰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두 팔을 벌린 채 떠내려가고 있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엄청나다”라는 문장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두 팔을 벌린 채 소리도 없이 저쪽 세계로 넘어가버렸다. 자신의 모든 글을 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채영주는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와 딸을 남겨놓고 어떤 자세로 저쪽 세계를 넘어갔는지, 알 길이 없다. 그가 남긴 유언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칼럼 |
[정찬, 세상의 저녁] 소설가 채영주의 죽음에 대한 회상 |
소설가 6월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소설가 채영주다. 그가 숨을 거둔 것은 2002년 6월15일이었다. 향년 40. 월드컵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이 포르투갈을 꺾고 첫 16강에 진출함으로써 전국이 열기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그의 죽음은 여느 죽음과 달랐다. 사인은 위 무력증이었다. 아사(餓死)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위 무력증에 시달리나 그것으로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의사는 채영주에게 나타난 증상이 병리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해 정신과 치료를 권유했다. 한동안 정신과 전문의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앙드레 말로에게 문학은 운명을 소유하는 수단이었다. 덧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유효한 도구가 문학인 것이었다. 채영주에게 문학은 무엇이었을까? 2남2녀 중 막내였던 그는 공부를 무척 잘했다. 교사였던 양친이 막내에게 원한 것은 학자였다.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 때인 1984년 그는 양친의 소망대로 정치학자가 되기 위해 독일 유학을 준비했다. 유학 관련 시험을 하루 앞둔 8월 어느 날 주변과 연락을 끊고 잠적해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는 대전, 전주, 광주 등지를 떠돌며 익명의 존재가 되어 웨이터, 주방 보조, 빵공장 직공 등의 일을 하면서 자신의 삶과 전혀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 속에서 살았다. 그해 10월 부친의 병환 소식에 귀가하여 양친에게 학자의 길을 접고 소설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견고한 교육자 가풍 속에서 조형된 삶에 저항한 혁명적 일탈 행위이자 존재의 변신이었다. 채영주의 두 번째 일탈 행위는 1992년 결혼 직전에 일어났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잠적한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고 식장을 찾은 하객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그가 잠적한 가장 큰 이유는 1991년 3월 동남아시아 여행 도중 타이에서 만난 중국계 싱가포르 국적 여성 주채여(朱彩如)였다. 1993년 5월 채영주는 주채여와 결혼했다. 자기 속의 불확실성에 대한 환멸 때문에 누구도 책임 있게 사랑할 수 없었다던 그가 책임 있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의 세 번째 일탈이자 변신은 그전보다 한층 근원적이었다. 죽음보다 더 근원적인 일탈과 변신은 없다. 채영주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2002년 4월 초순이었다. 이사를 앞두고 그에게 전화했는데, 얼마 전부터 부쩍 약해진 위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다고 했다. 이사 후 집이 정리되면 초대하겠다는 나의 말에 그는 빨리 위가 좋아져 형수님이 차려주신 음식을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그렇게 홀연 떠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가 가족을 데리고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딸 스민이 아장아장 걸을 때였다. 나는 아내와 어린 딸을 향한 채영주의 한없는 사랑을 알고 있다. 딸을 이야기할 때는 꿈속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가 왜 굶어 죽었을까? 1988년 11월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단편 ‘노점사내’를 발표, 소설가의 길에 들어선 후 2002년 타계할 때까지 세권의 소설집과 다섯권의 장편소설을 펴내는 동안 그 흔한 문학상들이 모두 채영주를 비껴갔다. 그의 소설은 문학상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는 원고와 인세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전업작가였지만 대중성에 능숙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역하고 문학에 투신한 그에게 문학은 좀처럼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맑고 예민하고 엄격한 그의 영혼이 입은 상처와 절망의 깊이를 헤아릴 눈이 나에게는 없다. 카프카는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시간은 짧고 힘은 적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름답고 똑바른 삶이 불가능하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썼다. 그가 숨을 거둔 것은 마흔한번째 생일을 한달 앞둔 1924년 6월3일이었다. 카프카의 일기에서 내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나는 아직까지 결정적인 것을 쓰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두 팔을 벌린 채 떠내려가고 있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엄청나다”라는 문장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두 팔을 벌린 채 소리도 없이 저쪽 세계로 넘어가버렸다. 자신의 모든 글을 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채영주는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와 딸을 남겨놓고 어떤 자세로 저쪽 세계를 넘어갔는지, 알 길이 없다. 그가 남긴 유언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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