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가 추구한 시인의 궁극적 모습은 ‘견자’(見者)였다. 사람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가 견자다. 견자의 시가 투시력이 내재한 언어로 직조되는 것은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랭보는 인류가 문명을 이루면서 잃어버린 태초의 시인이자 초월적 존재인 샤먼이 되고자 한 것이다.
소설가 세계 문학사에서 랭보(1854~1891)만큼 가혹하고 미묘하며 이상스러운 삶을 산 예술가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16세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21세에 절필하기까지 랭보가 추구한 시인의 궁극적 모습은 ‘견자’(見者)였다. 사람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가 견자다. 견자의 시가 투시력이 내재한 언어로 직조되는 것은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랭보는 인류가 문명을 이루면서 잃어버린 태초의 시인이자 초월적 존재인 샤먼이 되고자 한 것이다. 샤먼이 되려면 고통이라는 통과제의를 거쳐야 한다. 랭보에게 통과제의는 세상의 질서를 초월하는 행위였다. 랭보가 견자를 ‘성스러운 죄인이자 저주받은 존재’로 표현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랭보의 ‘성스러운 죄’는 17세 때인 1871년 베를렌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랭보에게 베를렌은 시의 인도자이자 ‘성스러운 죄의 어머니’였다. 랭보의 눈에 집과 학교와 교회는 영혼을 세상의 틀에 가두려는 좁고 닫힌 세계로 보였다. 랭보가 평생 떠돌아다닌 것은 영혼의 갇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랭보의 두 다리는 존재의 날개였다. 1871년 3월 파리에서 민중이 봉기하여 코뮌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에 랭보가 열광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얼마나 열광했으면 사회주의 헌법 초안까지 작성했을까. 열일곱 살 시인이 해방의 세계, 축제의 세계를 기쁨의 언어로 설계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랭보의 ‘저주받은 삶’은 1873년 7월 베를렌의 총격 사건으로 전환점을 맞는다. 베를렌이 랭보를 향해 두 번 방아쇠를 당겼고, 첫 발이 랭보의 왼손에 박혔다. 죽음의 스침이 불러일으킨 엄청난 충격 속에서 샤를빌의 집으로 귀환한 랭보는 다락방에 틀어박혀 불을 훔친 자, 견자가 되기를 염원한 자가 추락, 방황, 환멸, 포기와 함께 믿음, 희망, 새로운 탄생을 이야기하는 고백록인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완성한다. 그 후 런던에서 거의 일 년을 머무르며 <채색판화집>을 쓰고는 유럽을 정처 없이 떠돌다 아프리카로 떠난 것은 1880년 3월이었다. 유럽에서의 삶과 함께 ‘시인의 시간’을 가차 없이 끊어버린 것이다. 랭보가 원한 것은 자신과 관계한 모든 사람을 잊고, 그들에게 잊힌 채 낯선 세계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랭보의 두 다리는 오디세우스의 길을 역류하고 있었다. 랭보가 유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돌아간 것은 존재의 날개를 잔인하게 꺾어버린 병의 습격 때문이다. 랭보가 무릎 통증을 느낀 것은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 이름) 하라르에 거처를 두고 사막과 오지를 떠돌면서 상인 생활을 한 지 11년째 되던 해인 1891년 초였다. 통증은 점점 심해져 걸을 때 못이 비스듬히 박히는 듯했다. 하라르에는 의사도 병원도 없었다. 들것 운반자 16명을 고용한 랭보는 산과 사막, 비와 태양을 뚫고 가는 300킬로미터의 지옥과 같은 여행을 시작했다. 11일 후 항구도시 제일라에서 홍해를 건너는 배를 탔고, 사흘 만에 아덴에 도착했다. ‘매우 위독한 상태의 활액막염’이라고 진단한 아덴의 의사는 유럽의 병원으로 갈 것을 권고했다. 랭보가 마르세유에 도착한 것은 1891년 5월이었다.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부위에 통증이 일면서 성한 쪽 다리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7월에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갔지만 절단된 부위가 붓고 통증이 계속되어 한 달 후 다시 마르세유 병원으로 돌아왔다. 아프리카로 돌아가기를 열망했던 랭보는 모르핀 주사로 인한 꿈의 상태에서 죽었다. 1891년 11월10일 아침 10시경이었다. 랭보는 존재의 전부였던 시를 왜 가차 없이 버렸을까? 랭보의 진정한 시의 스승은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19)였다. 라틴어 수업에서 마주쳤던 베르길리우스의 시에 랭보는 금방 취했다. 견자를 인식하게 된 것은 베르길리우스를 통해서였다. 베르길리우스에게 시 창작은 신성에 이르는 거룩한 노동이었다. 시인은 견자이기에 인류가 시인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휘황한 비전에 랭보는 황홀을 느꼈다. 시를 통해 황금시대를 꿈꾸었던 베르길리우스가 시에 절망하여 세상의 지옥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 모습을 랭보는 오래된 언어를 통해 보았다. 베르길리우스는 다시 펜을 들었지만 그 모습이 랭보의 눈에는 타락한 시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타락한 시의 스승을 바라보면서 나는 타락하지 않으리라, 나는 견자가 되리라, 랭보는 다짐했을 것이다. 그런 랭보가 왜 시를 가차 없이 버렸을까? 랭보의 죽음을 품은 11월이 무서운 것은 운명이 무섭기 때문이며, 운명의 심연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문학이 무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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