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많은 이들이 도청을 떠났다. 도청에 남은 이들은 ‘해방광주’와 함께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해방광주’의 심장부인 도청이 3공수여단 특공조에게 점령된 것은 5월27일 새벽이었다. ‘해방광주’가 사라지면서 열흘간의 역사는 금기어가 되었다.
소설가 광주항쟁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의 죽음과 마주친다. 1970년대 유신체제는 박정희 한 사람을 위해 모두가 어릿광대가 되어야 하는 대단히 비정상적인 권력구조였다. 1976년 10월, 3년간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을 지낸 도널드 그레그는 텍사스 대학 강연에서 “박정희 정권이 지금과 같은 정치를 계속한다면 몇 년 안에 붕괴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3년 뒤 박정희가 피살되었다. 권력의 공백 속에서 군부의 태도는 조심스러웠고, 그것이 정치세력 간 긴장 속의 균형을 이루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이 균형을 허문 사건이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영남군벌의 12·12 쿠데타였다. 쿠데타의 목표가 계엄사령관 정승화인 것은 군 인사권자인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권력이 상실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쿠데타의 성공으로 군 권력을 장악했지만 국가 권력까지 장악할 수 없었다. 유신체제 지속을 원하는 국민은 10%에 불과했다. 신군부 권력은 10%의 권력에 불과했던 것이다. 두번째 쿠데타가 필요한 이유였다. 두번째 쿠데타는 1980년 5월17일에 일으켰다. 5월13일부터 시작된 학생들의 대규모 가두시위가 중단된 지 이틀 후였다. 비상계엄을 확대하면서 반유신 인사들을 체포하고, 계엄포고령 10호로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이 신군부의 쿠데타에 숨죽이고 있던 5월18일 정오 무렵, 800여명의 학생들이 광주도청 앞에서 외로운 시위를 하고 있었다. 광주 시위는 신군부한테 눈엣가시였다. 시위 규모는 보잘것없었지만 더 큰 시위의 불씨가 될 가능성 때문이었다. 신군부는 7공수여단을 광주 도심에 투입했다. 백주 대로에서 군인들이 자행한 폭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짓밟으면 꺼질 줄 알았던 광주의 불씨는 오히려 커져갔다. 군인들의 야만적 폭력이 공동체 의식이 강한 광주시민에게 윤리적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 결과 시위 진압 사흘째인 5월20일 신군부는 믿기 힘든 두 가지 상황에 직면했다. 3개 여단 3천여명의 특전사 병력과 1만8천명의 폭동 진압 경찰관이 시위대에 밀리는 상황과, 무정부 상태임에도 비정치적 범법행위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불가사의한 상황이었다. 5월21일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했고, 그 참상은 시위대를 시민군이라는 무장집단으로 변화시켰다. 그날 오후 신군부는 특전사 병력을 광주 시내에서 외곽으로 옮겼다. 광주가 ‘해방’된 것이었다. 신군부가 ‘해방광주’를 두려워한 것은 ‘서울’을 자극하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시위가 다시 일어나면 그들의 권력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해방광주’는 민주주의의 거점이었다. 5월26일 오후 5시, 계엄사는 광주 점령 작전 시작을 알리면서, 자정 이후 도청에 남아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한다고 경고했다. 항쟁 지도부는 이 사실을 궐기대회에서 공식 발표했다. 그날 저녁 많은 이들이 도청을 떠났다. 도청에 남은 이들은 ‘해방광주’와 함께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해방광주’의 심장부인 도청이 3공수여단 특공조에게 점령된 것은 5월27일 새벽이었다. ‘해방광주’가 사라지면서 열흘간의 역사는 금기어가 되었다. 광주시민들이 죽음을 통해 드러낸 것은 신군부의 실체였다. 쿠데타에 반대하는 국민을 학살하는 신군부의 행위는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들의 행위는 독재의 반인륜성과 함께 민주주의의 가치를 일깨움으로써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획득한 보편적 진실의 소중함을 환기시켰다. 세계의 언론이 ‘해방광주’를 주시한 까닭은, 신군부가 ‘해방광주’를 두려워한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역사에서 개인의 실존을 느낀다는 것은 매우 희박하다. 권력의 실존만 확인된다. 5월광주는 그렇지 않았다. 개인의 실존이 권력의 실존을 견뎌냄으로써 권력이 삼키려 한 ‘진실’을 지켜낸 것이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강물처럼 쉼 없이 이어진 것은 역사의 어둠을 밝히는 5월광주의 등불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7년 4월에 출판된 <전두환 회고록>에 “계엄군과 시위대의 충돌은 무장한 시민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공수부대의 자위권 발동이었다, 광주에서 진행되는 작전상황과 관련해 조언이나 건의를 할 수조차 없었다, 광주사태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원죄가 됨으로써 그 십자가는 내가 지게 되었다” 등의 문장들이 나온다. <전두환 회고록>은 언어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절망과 함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되씹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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