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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11 18:07 수정 : 2018.10.12 14:03

거진 반생애를 독일에 살면서 향수와 모국어에 대한 허기를 식량으로 글을 써온 시인이 어느 날 죽음과 마주쳐 ‘혼자 가는 먼 집’의 길을, 그 멀고 캄캄한 길을, 너무나 멀고 캄캄해 등불 없이는 갈 수 없을 것 같은 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모국어로 이루어진 자신의 책이 등불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정찬
소설가

‘수만리 저편의 너는 집에 없었다. 네가 집에 없었으므로 나는 기분이 좋았다. 너는 어디론가 가서 너의 현재의 시간을, 단 하나, 인간에게 주어진 살아 있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므로.’

위의 글은 2005년 가을에 출판된 시인 허수경의 산문집 <모래도시를 찾아서>에 수록된 ‘작가의 말’이다. ‘모래도시’는 고고학도였던 허수경이 발굴 작업을 한 도시를 일컫는다. ‘작가의 말’에서 ‘너’는 허수경 자신으로 읽힌다. 독일에 사는 시인이 한국에 사는 ‘나’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다. ‘나’는 시인의 ‘다른 나’일 수도 있고, ‘과거의 나’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너’가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므로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신도 인간도 다 떠난 기억의 골짜기’에서 생명의 흔적만을 찾아왔기에 현재의 시간, 살아 있는 시간이 한층 사무쳤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현재의 시간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지난 10월3일 독일 뮌스터에서 위암으로 타계한 것이다. 향년 54. 허수경의 동생 허훈은 “어젯밤에 소식을 들었다. 누나는 2011년 진주에 다녀간 게 마지막 고향 길이었다. 처음 귀국했을 때 공항에서 가족을 찾던 누나의 표정을, 향수병과 두려움에 찬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시인으로 등단한 허수경이 한국을 떠나 독일 뮌스터대에서 고대근동고고학 공부를 시작한 것은 1992년이었다. ‘존재론적 변신’으로 표현해야 할 만큼 삶의 형태를 통째로 바꾼 것이다.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인 교수와 결혼하고 타계할 때까지 26년 동안 글쓰기를 쉼 없이 이어온 데에는 모국어에 대한 허기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허수경은 <존재할 권리>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이 나라의 말, 설렌다, 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그 말 앞에서 내 마음은 요지부동, 꼼짝하지 않는다. 그 말은 나를 설레게 하지 않는다. 나는 내 말 속에서 설렌다’라는 문장으로 모국어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향수를 토로했다.

1995년 가을 잠시 귀국한 허수경을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다 어린 시절 처음 기차를 타고 간 도시가 외가인 진주라고 말했더니 어둑신했던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가 자란 남쪽 지방에는 잘게 썬 방아 잎과 산초가루를 넣어 추어탕 맛을 내곤 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이면 어디에 있든 나는 그 냄새를 그리워했다.’

허수경이 그리워한 추어탕 냄새 속에는 태어나고 자란 진주라는 공간과 그 속에 살아온 ‘과거의 나’가 아늑히 잠겨 있을 것이다. 2005년 가을에 펴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서 4편의 시를 특별히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옮겨놓은 것은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의 표현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그 흔한 영혼이라는 거 멀리도 길을 걸어 타박타박 나비도 달도 나무도 다 마다하고 걸어오는 이 저녁이 대구국 끓는 저녁인 셈인데’(<대구 저녁국>)를 ‘그 흐저다한 혼이라는 길이 말종이 먼재도 길 타서 타박타박 나배도 달녁도 낭구도 마다코 걸어다미는 이 저녁 새 대구국 기리는 저녁센데’로 옮겼고, ‘거친 손을 뱃사공이 내밀며/ 가자, 가자, 할 때,/ 그때 어디로,/ 라고 묻지 못하는 길/ 오랫동안 걸은 듯’(<가을 물 가을 불> 부분)을 ‘거버덩한 손 사공네 내밀며/ 가입시더, 가예, 할 적,/ 그녁 어데로,/ 라 청하지 못다한 길/ 오래 하등히 걸은 듯’으로 옮겼다.

작가의 죽음이 여느 죽음과 약간 다른 것은 작품이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작품이란 뜻 그대로 작가가 만든(作) 물건(品)이다. 물건은 생명체가 아니다. 하지만 작가가 만든 물건의 경우 생명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은유의 차원에서 작품은 생명체다. 이 생명체가 작가의 삶과 죽음 사이에서 스스로의 빛으로 삶과 죽음을 비춘다. 작가의 죽음만이 지니는 고유성은 여기에서 형성된다.

허수경이 위암 투병 중이던 지난 2월 출판사 편집자에게 편지로 자신의 상태를 알리면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세상에 뿌려놓은 제 글빚 가운데 제 손길이 다시 닿았으면 하는 책들을 다시 그러모아 빛을 쏘여달라’고 자신의 소망을 전했다. 거진 반생애를 독일에 살면서 향수와 모국어에 대한 허기를 식량으로 글을 써온 시인이 어느 날 죽음과 마주쳐 ‘혼자 가는 먼 집’의 길을, 그 멀고 캄캄한 길을, 너무나 멀고 캄캄해 등불 없이는 갈 수 없을 것 같은 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모국어로 이루어진 자신의 책이 등불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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