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은 소설의 인물이 감행하는 행위의 철저함이야말로 이미 이룩된 세계의 허위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환기함으로써, 소설에서 역사철학의 중요성과 함께 소설의 심연을 응시하는 시선의 깊이와 두께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소설가 지난 10월25일 향년 82세로 별세한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1987년 8월에 쓴 에세이에서 “사람에 있어 의무란 무엇이겠는가. 외로움 아니겠는가. 외로움이란 혼자 있음을 직접적으로 가리킴이다”라고 썼다. 단독저서만 147종에 이르는 그의 놀라운 글쓰기의 원천이 ‘외로움을 사람의 의무’로 생각한 그의 특별한 세계관에 있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김윤식 글의 진경은 그의 평론집 <황홀경의 사상>(홍성사, 1984) 첫 장인 ‘황홀경의 환각’이다. ‘안평대군의 제문과 발문이 양쪽 날개를 이룬’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품고 있는 ‘황금빛’에서 인류의 영원한 꿈인 유토피아 사상을 이끌어낸 김윤식은 서양의 유토피아 사상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아르카디아 사상으로 건너가 유토피아의 땅 아르카디아를 그린 문예부흥기의 화가 로랭과 함께 니체를 불러낸다. 건강 악화로 바젤대학에서 물러나 절망과 외로움 속에서 글을 쓰고 있던 니체가 1867년 6월께 스위스 산록에서의 경험을 “어제 저녁녘 나는 로랭적 황홀에 빠져 마침내 오래도록 울었다”라고 쓴 글에 대해 김윤식은 “독일 고전주의 사상의 황금광맥이 빛바래져 보이지 않는 가난한 시대를 처음으로 발견한 니체라는 명민한 시인의 놀라움”으로 표현하면서 황홀경의 체험을 통해 한층 더 깊은 세계를 보여준 도스토옙스키로 우리를 끌고 간다. 유토피아의 황홀경과 허무주의는 쌍생아의 관계다. 김윤식의 표현에 따르면 ‘신은 죽었다’로 표상되는 근대라는 이름의 흙더미가 황금시대를 덮어버렸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깊을수록 유토피아가 불러일으키는 황홀경도 깊어지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문제적 소설 <악령>의 깊은 황홀경의 바탕에는 인간 속에 내재한 악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 김윤식이 주목한 것은 ‘인류로 하여금 사는 일은 물론 죽는 일조차 불가능케 하는 로랭적 황홀경’에 대응하는 새로운 황홀경을 소설을 통해 창조한 도스토옙스키의 독창성이었다. <악령>의 독창성이 심화되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로랭적 황홀경을 인류사에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죄와 벌>. 내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은 것은 18살 때였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절대적 도덕률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 사실을 깨닫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라스콜니코프의 허무적 초인사상은 충격적 관념이었다. 그는 절대적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는 선택된 인간, 즉 초인을 꿈꾸었다. 그 꿈이 라스콜니코프에게 지시한 것은 전당포 노파의 살해였다. 꿈이란 마땅히 아름다워야 한다는 사춘기적 상상의 항아리가 산산이 부서지면서 소설이 품고 있는 아득한 심연을 처음으로 엿본 순간이었다. 김윤식은 도스토옙스키 시대의 제정 러시아가 사상(환각)이 현실 위를 질주한 사회라는 것, 라스콜니코프의 도끼는 사상의 물질적 형태라는 것, 전당포 노파의 살해는 자신의 혼을 시험하기 위한 ‘문제적 인물’의 실천행위라는 것, 소설의 인물이 감행하는 행위의 철저함(악의 철저함이든 선의 철저함이든)이야말로 이미 이룩된 세계의 허위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환기함으로써, 소설에서 역사철학의 중요성과 함께 소설의 심연을 응시하는 시선의 깊이와 두께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그를 바라보는 나의 눈에 문학평론가의 모습보다 사상가의 모습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분단체제의 한국 사회에서 사상은 라스콜니코프의 도끼처럼 위험했다. 김윤식이 한때 빠져 있었던 헤겔주의자들의 글쓰기 방식을 1980년대 중반에 멈춘 이유에 대해 “헤겔주의자들의 생각이 자본주의 사회를 겨냥한 것이어서 완전한 내적 형식이 되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분단체제가 강요하는 사상 연구의 한계와 관계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언젠가부터 사상적 내용의 글쓰기에서 물러선 것은, 한동안 글쓰기 방향의 지표로 삼았던 헤겔주의자 루카치가 개인적 자아주의의 분열 상태에서 인간다움의 공동체를 찾는 유일한 방식으로 꼽은 장편소설에 거리를 둔 채 단편소설평에 시간을 바친 것은 위의 사실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언젠가 그는 “나는 일기를 쓰지 않고, 나를 쓰지 않고, 남을 쓰고 있다”고 고백한 적 있다. 문학평론가의 숙명을 이야기한 것으로 비치지만 그 숙명 속에 분단체제 지식인의 숙명도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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