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구되었을 때 카뮈의 ‘청아한 도덕적 목소리’가 <최초의 인간>과 함께 솟아오른 것이었다. 카뮈의 정직성과 도덕적 용기는 ‘가장 낮은 존재’인 어머니를 ‘가장 높은 존재’로 바라보았던 그의 세계관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 카뮈의 죽음은 한편의 부조리극처럼 들이닥쳤다. 프랑스 남쪽 전원마을 루르마랭에 은거한 카뮈는 아비뇽 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끊었으나 마침 그곳에 내려와 있던 친구의 권유로 그의 승용차를 타고 파리로 향했다. 그 승용차가 5번 국도 빌블르뱅에서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들이받은 것은 1960년 1월4일 오후 2시 조금 못 되어서였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카뮈는 즉사했다. 향년 47. 주검이 된 카뮈의 호주머니에서 쓰지 못한 기차표가, 카뮈의 검은색 가방에서는 소설 <최초의 인간> 미완성 초고가 발견되었다. <최초의 인간>이 출판된 것은 그로부터 34년 뒤인 1994년 4월이었다. 소설 첫 페이지에 ‘중계자: 카뮈 미망인’이라는 글과 함께 ‘이 책을 결코 읽지 못하는 당신에게’라는 헌사가 있다. ‘중계자’와 헌사의 대상자는 모두 카뮈 어머니다. 선천적으로 귀가 어두웠던 카뮈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알제리 이민 3세대였던 카뮈는 아버지 없이 자란 어린 시절에 대해 “가난하게 살아온 수년의 세월은 어떤 감수성을 형성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특별한 경우에는 아들이 어머니에게 품는 기이한 감정이 그의 감수성 전체를 이룬다”고 하면서 “어머니의 그 기이한 무관심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세계의 광대한 고독밖에 없다”고 썼다. 어머니의 고독은 아들의 고독을 낳았고, 아들은 고독 속에서 어머니를 둘러싼 고독의 깊이를 헤아리면서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만들어나간 것이었다. 카뮈의 글에서 ‘어머니’가 다양한 이미지로 변용되는 이유는 어머니가 문학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1957년 12월10일 카뮈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세상의 저쪽 끝에서 온갖 수모를 겪고 있는 이름 모를 한 수인(囚人)의 침묵은 작가를 유적(幽寂)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고 말했다. 이 문장에서 ‘수인’을 글자의 의미로만 받아들이면 카뮈의 언어가 품은 풍요로운 상징의 숲으로 들어갈 수 없다. 나의 눈에 수인이라는 언어 속에는 카뮈 어머니 모습이 어른거린다. 타인과의 소통 수단인 언어를 잃어버린 카뮈 어머니야말로 세상의 저쪽 끝에 갇힌 진정한 수인이다. 그 수인의 깊고 어두운 침묵이 아들을 유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수상식 이틀 뒤인 12월12일 오후 스톡홀름대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 도중 한 알제리 청년이 “당신은 동유럽 나라들을 위해 탄원서에 서명하면서도 알제리를 위해서는 3년 전부터 서명한 적이 없다”고 카뮈를 비난했다. 당시 알제리는 프랑스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카뮈는 청년에게 “나는 언제나 테러를 비난해왔다. 나의 어머니와 가족을 해칠지도 모르는 테러리즘에 대해서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나는 정의를 믿는다. 그러나 정의에 앞서 내 어머니를 더 옹호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해 “알제리인들의 정의에 맞서 카뮈는 자신의 어머니를 내세운다” “수백만명의 알제리인을 어머니와 동격으로 생각한다”는 등 카뮈를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카뮈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을 때도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노벨이 끝장난 작품에 왕관을 씌운다” “스웨덴 한림원이 젊은 작가를 찾아냈다고 믿었겠지만 실은 ‘조기 경화증’을 확인했다”고 야유했다. 카뮈가 비판의 세례 속에 있었던 것은 그가 태어나고 27살까지 살았을 뿐 아니라 어머니가 살고 있는 알제리와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를 동시에 껴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세계를 대립적 관계로 보는 많은 사람에게 카뮈의 그런 모습이 ‘이방인’으로 비쳤을 것이다. 고립과 상처 속에서 카뮈가 몰두한 것은 첫 자전소설인 <최초의 인간> 집필이었다. 1994년 4월 <최초의 인간>이 출판되자 프랑스 문단과 지식인 사회는 물론 대중까지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카뮈의 놀라운 ‘부활’에 대해 영국의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가장 훌륭한 프랑스인>이라는 제목의 서평에서 “카뮈의 청아한 도덕적 목소리가 1958년의 양극화된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고 썼다. 소비에트와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붕괴로 세계가 다극화의 모습으로 변화되고 자본의 야만적 얼굴이 전면적으로 표출되면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구되었을 때 카뮈의 ‘청아한 도덕적 목소리’가 <최초의 인간>과 함께 솟아오른 것이었다. 카뮈의 정직성과 도덕적 용기는 ‘가장 낮은 존재’인 어머니를 ‘가장 높은 존재’로 바라보았던 카뮈의 세계관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들의 죽음을 겪은 카뮈 어머니는 그로부터 8개월 뒤인 1960년 9월 아들이 떠난 세계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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