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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8 16:59 수정 : 2019.03.28 19:11

정찬
소설가

전두환이 광주 법정에 섰던 3월11일 눈길을 끈 장면이 있었다. 광주지법 건너편의 동산초등학교 학생들이 점심시간에 교실 안 쉼터 의자용 계단에 서서 창밖을 향해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친 것. 나흘 뒤인 3월15일 자유연대, 자유대한호국단 등의 극우단체들이 동산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초등학생들이 전두환을 어떻게 아느냐? 배후에는 전교조 교사들이 있을 거라는 강한 추측을 한다” “교사와 부모들이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다. 교육은 대한민국의 국법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분노할 국민을 대신해서 왔다”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그들의 ‘기자회견’ 나흘 뒤인 3월19일 한국을 찾은 파비안 살비올리 유엔 진실·정의·배상·진상규명 특별보고관은 한국에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규정이 없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5·18 민주화운동 등 국가폭력 피해자를 향한 혐오표현에 대해 “자유권 규약에 따라 국가는 혐오표현을 하지 못하게 할 의무가 있다. 혐오표현이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피해자를 적대시하는 사회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5·18 현장에서 취재한 <에이피>(AP) 통신 기자 테리 앤더슨은 “5·18은 사실상 군인들의 폭동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규정했다. 첫 희생자는 28살 농아장애인 김경철이었다.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그는 5월18일 오후 4시께 금남로에서 군인들에게 붙잡히자 소리와 몸짓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했지만 군인들의 무차별 구타에 쓰러져 군 트럭에 내던져졌고, 이튿날 새벽 국군통합병원에서 숨졌다.

1995년 12월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희생자에 대한 보상 및 묘역의 성역화가 이루어졌고, 2011년 5월 5·18과 관련된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5·18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실질적인 출발점이자 준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를 이루는 데 기여했으며, 나아가 냉전체제를 깨트리는 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교사와 부모들이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다”는 극우단체들의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전두환을 어떻게 아느냐?”는 물음에는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름은 몰라도 전두환을 모르는 초등학생은 없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전두환은 광주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극우집단이 5·18 민주화운동을 못 견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절대적 맹신 때문이다. 광주를 유혈진압한 후 간선제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1980년 9월16일 <워싱턴 포스트> 회견에서 “만일 광주사태가 다른 도시로 확대됐다면 김일성이 10만 침략군을 내려보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분단이 만든 반공이데올로기가 광주학살을 정당화하는 근거였던 것이다. 이에 변혁운동가들은 국가폭력의 도구가 되어버린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제기했다. 그 물음은 반공이데올로기의 형성과 고착이 이루어졌던 1945~53년의 한국 현대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하게 함으로써 서구의 다양한 좌파사상이 연구와 학습, 해석과 논쟁을 통해 내면화되어갔다. 1980년대를 점철했던 권력과의 이데올로기 전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치열함은 반공이데올로기가 허용하지 않았던 좌파사상의 공간을 창출했다. 그것은 남한 사회를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변화시키는 생명체적 공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반공이데올로기의 절대성이 허물어지면서 형성된 새로운 생명의 공간이 1987년 6월항쟁의 공간을 거쳐 2016년 촛불혁명의 공간으로 진화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질적 도약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극우집단이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끊임없이 혐오표현을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혐오표현은 “종북좌파들이 5·18 유공자라는 괴물집단을 만들어냈다”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폭동이다” 등 자유한국당 의원들도 거침없이 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법이든 형법이든 적어도 하나의 수단을 통해 혐오표현을 반드시 금지해야 한다.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으면 그 과거는 계속해서 현재의 우리에게 돌아온다”고 한 살비올리 특별보고관의 발언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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