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고, 결과적으로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되었다”고 언급한 이후 김원봉을 둘러싸고 이념 논쟁이 벌어졌다. 정파와 이념을 뛰어넘어 통합으로 가자는 취지였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논쟁은 더 격화됐다. 급기야는 차명진 자유한국당 전 의원이 김원봉의 월북 이후의 정치적 행적을 거론하면서 “문재인은 빨갱이”라고 말했고,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일제의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만나 “백 장군님이 우리 군을 지켰고,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사실이 명백한데 김원봉이라는 사람이 군의 뿌리가 된 것처럼 말을 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원봉의 생애는 크게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월북 이후로 나눌 수 있다. 남한 사회의 반공세력은 월북을 이유로 김원봉의 독립운동 행적을 지우려 했고, 그 결과 김원봉의 생애가 두 동강이 난 채로 역사의 강물에서 표류해왔다. 분열된 그의 생애를 복원하려면 해방공간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해방공간은 반공세력이 친일세력을 끌어들여 사회주의 세력은 물론 우파 민족주의 세력까지 압살한 카오스적 공간이었다. 이 카오스적 공간을 제대로 들여다보아야만 김원봉의 생애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김원일의 장편소설 <바람과 강>에 ‘이인태’라는 문제적 인물이 등장한다. 18살 때 고향을 떠나 북간도에서 독립투쟁을 하다 일본군에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숨겨야 할 사실들을 말해버린다. 그 대가로 풀려나 중국과 러시아, 일본을 떠돌던 중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고향에서 약간 떨어진 마을의 주막 과부에 의탁하여 8년을 살다 죽음에 이르는데, 그의 생애 마지막 겨울 어느 날 죽음을 예감한 그는 돼지우리에 들어가 잠을 자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그를 아무리 끌어내려고 해도 그는 앞으로 죽는 날까지 돼지우리에 살겠다고 하면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는 일본군 장교로부터 “우리도 너를 인간 이하로 대하며 족쳤지마는 그건 황실과 조국을 위한 애국의 일념이었다. 우리는 천황 폐하께서 우리에게 내린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그러나 너는 동족을 팔아먹은 개만도 못한 자식이다. 개돼지와 같기에 죽일 필요조차 없는 쓰레기다. 우리는 천황 폐하의 자비심으로 너를 석방시키기로 했다. 조선인은 이제 석방된 너를 어느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민족을 팔아먹은 너를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 테니 마적이 될 수도 없다. 앞으로는 살아 있는 그날까지 개돼지같이 살아!”라는 말을 들었고, 그의 자백으로 어린 자식을 잃은 조선인 아낙으로부터도 “평생 똥이나 처먹는 개돼지로 살아”라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일본군 장교와 조선 아낙의 말이 이인태로 하여금 20년을 넘게 낯선 타국을 부랑자로 떠돌게 했고, 해방 후 귀국했으나 고향에 발을 딛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 마침내 돼지우리로 들어가게 한 것이었다. 이인태의 생애는 허구지만 그 허구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비극을 관통하면서 역사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기억 상실을 고통스럽게 드러낸다. 간도특설대에 복무하면서 항일독립군 토벌 임무를 수행했던 백선엽은 일본어로 출판한 자서전에서 “우리가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역으로 우리가 게릴라가 되어 싸웠다 하더라도 독립이 빨라졌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 기이한 변명을 했다. 김원일은 “일제시대 친일파가 해방 후 일약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과거의 행적을 감추는 데 급급한 그 많은 사이비 애국자의 작태를 보면서 변절자의 반성적 삶을 써보고 싶었다”고 <바람과 강>의 창작 동기를 밝히면서 “일제 아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민족 반역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해방 후 준열한 자기비판을 통해 참회하는 시간을 왜 갖지 못하였는가?”라고 물었다. 남과 북은 오랜 세월 이데올로기에 갇힌 수인으로 살아오면서 역사의 존엄성을 상실해버렸다. 김원봉과 백선엽, 이인태의 생애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의 생애가 남과 북이 상실한 역사의 존엄성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칼럼 |
[정찬, 세상의 저녁] 김원봉, 백선엽, 이인태의 역사적 생애 |
소설가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고, 결과적으로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되었다”고 언급한 이후 김원봉을 둘러싸고 이념 논쟁이 벌어졌다. 정파와 이념을 뛰어넘어 통합으로 가자는 취지였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논쟁은 더 격화됐다. 급기야는 차명진 자유한국당 전 의원이 김원봉의 월북 이후의 정치적 행적을 거론하면서 “문재인은 빨갱이”라고 말했고,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일제의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만나 “백 장군님이 우리 군을 지켰고,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사실이 명백한데 김원봉이라는 사람이 군의 뿌리가 된 것처럼 말을 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원봉의 생애는 크게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월북 이후로 나눌 수 있다. 남한 사회의 반공세력은 월북을 이유로 김원봉의 독립운동 행적을 지우려 했고, 그 결과 김원봉의 생애가 두 동강이 난 채로 역사의 강물에서 표류해왔다. 분열된 그의 생애를 복원하려면 해방공간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해방공간은 반공세력이 친일세력을 끌어들여 사회주의 세력은 물론 우파 민족주의 세력까지 압살한 카오스적 공간이었다. 이 카오스적 공간을 제대로 들여다보아야만 김원봉의 생애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김원일의 장편소설 <바람과 강>에 ‘이인태’라는 문제적 인물이 등장한다. 18살 때 고향을 떠나 북간도에서 독립투쟁을 하다 일본군에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숨겨야 할 사실들을 말해버린다. 그 대가로 풀려나 중국과 러시아, 일본을 떠돌던 중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고향에서 약간 떨어진 마을의 주막 과부에 의탁하여 8년을 살다 죽음에 이르는데, 그의 생애 마지막 겨울 어느 날 죽음을 예감한 그는 돼지우리에 들어가 잠을 자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그를 아무리 끌어내려고 해도 그는 앞으로 죽는 날까지 돼지우리에 살겠다고 하면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는 일본군 장교로부터 “우리도 너를 인간 이하로 대하며 족쳤지마는 그건 황실과 조국을 위한 애국의 일념이었다. 우리는 천황 폐하께서 우리에게 내린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그러나 너는 동족을 팔아먹은 개만도 못한 자식이다. 개돼지와 같기에 죽일 필요조차 없는 쓰레기다. 우리는 천황 폐하의 자비심으로 너를 석방시키기로 했다. 조선인은 이제 석방된 너를 어느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민족을 팔아먹은 너를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 테니 마적이 될 수도 없다. 앞으로는 살아 있는 그날까지 개돼지같이 살아!”라는 말을 들었고, 그의 자백으로 어린 자식을 잃은 조선인 아낙으로부터도 “평생 똥이나 처먹는 개돼지로 살아”라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일본군 장교와 조선 아낙의 말이 이인태로 하여금 20년을 넘게 낯선 타국을 부랑자로 떠돌게 했고, 해방 후 귀국했으나 고향에 발을 딛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 마침내 돼지우리로 들어가게 한 것이었다. 이인태의 생애는 허구지만 그 허구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비극을 관통하면서 역사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기억 상실을 고통스럽게 드러낸다. 간도특설대에 복무하면서 항일독립군 토벌 임무를 수행했던 백선엽은 일본어로 출판한 자서전에서 “우리가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역으로 우리가 게릴라가 되어 싸웠다 하더라도 독립이 빨라졌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 기이한 변명을 했다. 김원일은 “일제시대 친일파가 해방 후 일약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과거의 행적을 감추는 데 급급한 그 많은 사이비 애국자의 작태를 보면서 변절자의 반성적 삶을 써보고 싶었다”고 <바람과 강>의 창작 동기를 밝히면서 “일제 아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민족 반역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해방 후 준열한 자기비판을 통해 참회하는 시간을 왜 갖지 못하였는가?”라고 물었다. 남과 북은 오랜 세월 이데올로기에 갇힌 수인으로 살아오면서 역사의 존엄성을 상실해버렸다. 김원봉과 백선엽, 이인태의 생애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의 생애가 남과 북이 상실한 역사의 존엄성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