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부타의숲·정신분석클리닉 대표 우리는 2016년과 17년을 통과하는 겨울과 그 일상들을 상실했었다. 추운 광장 밤거리에서 성냥팔이 소녀처럼, 촛불 하나에 의지해 이 나라를 구해보겠다고 오들거렸다. 그렇게 연말과 연시 몇달을 보내느라 송년 모임은 관심 밖에 머물렀다. 반가운 사람들은 촛불집회에서 만나고 집회가 파하면 순댓국집에서 소주 한잔으로 언 몸을 녹이고는 서로 허우적거리며 헤어지기 바빴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17년 연말은 유난히 송년 모임이 많게 느껴졌다. 모임마다 사람들도 올해는 연말 모임이 많은 것 같다고 한다. 그런 말들을 나누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희미한 안도감이 서리는 것을 본다. 국가와 정부와 민족을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고도 그냥 살아갈 수 있는 날들, 그런 일상에 대한 감각이 회복되고 있나 보다. <1987>을 봤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갔다. 80년대 초반 학번인 나는 <1987>이 담고 있을 법한 내용들을 87년 무렵 몇년 동안 겪었기 때문이다. 시위를 하고, 정리하고 나면 동료 몇몇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치를 떨며 소주를 마시고, 술 힘을 빌려 밤새 대자보를 쓰고, 등사기로 유인물을 수백장씩 밀고, 꽃병(화염병)을 만들고… 또 시위를 하고, 사과탄이 눈앞에서 터져 파편에 얼굴 수십군데가 째진 친구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뛰어갔다가 실명은 하지 않게 되었다는 소식에 안도하며 돌아와 세미나를 하고, 또 소주를 마시고, 대구 민정당사 공격 텍(작전)을 짜고, 내게도 수배가 떨어진 상태라 집에는 몇달째 들어가지도 못하는, 그런 일상을 몇년 동안 살았기에 영화관에 들어설 때까지도 <1987>은 조금 심드렁했다. 하지만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부분에서부터 심장이 떨리고 온몸이 바들거렸다. 초중반부터는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죽여 울었다. 그러다 종철이 아버님이 “아버지는 할 말이 없데이”라는 장면부터는 멍해지면서 넋을 잃고 그저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고, 그냥 저 멀리 있는 활동사진을 보듯 멍해졌다. 영화 후반부부터는 최루탄 냄새가 정말 나는 것 같았고, 한열이가 직격탄을 맞는 장면에서는 87년 6월 어느 날 대구 동성로 집회에서 작렬하는 최루탄을 피해 건물 벽으로 피신한 내 얼굴 바로 옆의 간판에 부딪혀 폭발하던 직격 최루탄이 감각되었고,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은 허벅지에 퍼지던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던 여학우를 보면서도 몸을 피했던 비겁함과, 이대로 우리는 질 수밖에 없을 거라던 끝 모르는 암담함이 먹구름처럼 다시 덮쳐왔다. 영화의 엔딩에서, 그 전에도 그 후로도 들을 수 없는 그 어떤 연설보다 더 처참하고 아름다웠던, 문익환 목사님이 열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던 그 연설에서 다시 내 몸은 무너졌다. 영화관 비상구 계단에서 손발을 떨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울면서 내 몸이 느끼는 것이 공포임을 깨달았다. 몸 곳곳에 맺혀 있던 공포가 서늘한 칼날이 되어 온몸을 베고 다녔다. 30년 전, 우리는 굳세어야 했고, 무너지지 말아야 했고, 안개 같은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깃발을 놓치지 말아야 했고, 백골단에 쫄지 말아야 했지만, 사실 나는 그때 무서웠다. 나는 그냥 스물몇살의 청년이었고, 가난했기에 그냥 잘살고 싶었고, 수더분한 여학생과 연애도 하고 그냥 공부하고 놀고 조금 슬프고 기쁘고 그렇게 살고 싶었던, 약간은 빛나고 때로는 지질한 젊은이였다. 그때도 나 역시 그냥, 그냥 살고 싶었다. 하지만 30년 동안 내 몸에 공포를 포자처럼 품고 있었음을 감각하자, 너무 서러웠고 억울하고 분했다. 그냥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1960년 4·19에서, 80년 광주에서, 1987년의 남영동과 길거리에서, 2015년의 물대포로 인해, 너무나 많은 이들의 삶이 소멸당했다. 제발 부탁이다, 올해부터는 우리 그냥 살게 해다오. 너희들만 없으면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다.
칼럼 |
[이승욱의 증상과 정상] 그냥 살아갈 수 있는 날들 |
닛부타의숲·정신분석클리닉 대표 우리는 2016년과 17년을 통과하는 겨울과 그 일상들을 상실했었다. 추운 광장 밤거리에서 성냥팔이 소녀처럼, 촛불 하나에 의지해 이 나라를 구해보겠다고 오들거렸다. 그렇게 연말과 연시 몇달을 보내느라 송년 모임은 관심 밖에 머물렀다. 반가운 사람들은 촛불집회에서 만나고 집회가 파하면 순댓국집에서 소주 한잔으로 언 몸을 녹이고는 서로 허우적거리며 헤어지기 바빴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17년 연말은 유난히 송년 모임이 많게 느껴졌다. 모임마다 사람들도 올해는 연말 모임이 많은 것 같다고 한다. 그런 말들을 나누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희미한 안도감이 서리는 것을 본다. 국가와 정부와 민족을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고도 그냥 살아갈 수 있는 날들, 그런 일상에 대한 감각이 회복되고 있나 보다. <1987>을 봤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갔다. 80년대 초반 학번인 나는 <1987>이 담고 있을 법한 내용들을 87년 무렵 몇년 동안 겪었기 때문이다. 시위를 하고, 정리하고 나면 동료 몇몇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치를 떨며 소주를 마시고, 술 힘을 빌려 밤새 대자보를 쓰고, 등사기로 유인물을 수백장씩 밀고, 꽃병(화염병)을 만들고… 또 시위를 하고, 사과탄이 눈앞에서 터져 파편에 얼굴 수십군데가 째진 친구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뛰어갔다가 실명은 하지 않게 되었다는 소식에 안도하며 돌아와 세미나를 하고, 또 소주를 마시고, 대구 민정당사 공격 텍(작전)을 짜고, 내게도 수배가 떨어진 상태라 집에는 몇달째 들어가지도 못하는, 그런 일상을 몇년 동안 살았기에 영화관에 들어설 때까지도 <1987>은 조금 심드렁했다. 하지만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부분에서부터 심장이 떨리고 온몸이 바들거렸다. 초중반부터는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죽여 울었다. 그러다 종철이 아버님이 “아버지는 할 말이 없데이”라는 장면부터는 멍해지면서 넋을 잃고 그저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고, 그냥 저 멀리 있는 활동사진을 보듯 멍해졌다. 영화 후반부부터는 최루탄 냄새가 정말 나는 것 같았고, 한열이가 직격탄을 맞는 장면에서는 87년 6월 어느 날 대구 동성로 집회에서 작렬하는 최루탄을 피해 건물 벽으로 피신한 내 얼굴 바로 옆의 간판에 부딪혀 폭발하던 직격 최루탄이 감각되었고,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은 허벅지에 퍼지던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던 여학우를 보면서도 몸을 피했던 비겁함과, 이대로 우리는 질 수밖에 없을 거라던 끝 모르는 암담함이 먹구름처럼 다시 덮쳐왔다. 영화의 엔딩에서, 그 전에도 그 후로도 들을 수 없는 그 어떤 연설보다 더 처참하고 아름다웠던, 문익환 목사님이 열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던 그 연설에서 다시 내 몸은 무너졌다. 영화관 비상구 계단에서 손발을 떨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울면서 내 몸이 느끼는 것이 공포임을 깨달았다. 몸 곳곳에 맺혀 있던 공포가 서늘한 칼날이 되어 온몸을 베고 다녔다. 30년 전, 우리는 굳세어야 했고, 무너지지 말아야 했고, 안개 같은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깃발을 놓치지 말아야 했고, 백골단에 쫄지 말아야 했지만, 사실 나는 그때 무서웠다. 나는 그냥 스물몇살의 청년이었고, 가난했기에 그냥 잘살고 싶었고, 수더분한 여학생과 연애도 하고 그냥 공부하고 놀고 조금 슬프고 기쁘고 그렇게 살고 싶었던, 약간은 빛나고 때로는 지질한 젊은이였다. 그때도 나 역시 그냥, 그냥 살고 싶었다. 하지만 30년 동안 내 몸에 공포를 포자처럼 품고 있었음을 감각하자, 너무 서러웠고 억울하고 분했다. 그냥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1960년 4·19에서, 80년 광주에서, 1987년의 남영동과 길거리에서, 2015년의 물대포로 인해, 너무나 많은 이들의 삶이 소멸당했다. 제발 부탁이다, 올해부터는 우리 그냥 살게 해다오. 너희들만 없으면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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