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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06 22:13 수정 : 2018.05.06 22:16

이승욱
닛부타의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공공의 지면에 가족사를 얘기하자니 여러모로 민망하지만, 남북의 현실과 너무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개인사를 좀 나누고 싶다. 언젠가 이 지면에서 내 아버지 얘기를 한 적이 있다.(<한겨레> 1월22일치 ‘1·4후퇴, 아버지와 나’)

조상 중에 부자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마는, 함경도 단천이 고향인 내 할아버지도 선대로부터 물려받고 불린 농지가 엄청났던 것 같다. 북한에 몇 안 되는 평야지대인 단천평야에서 해마다 소출이 수천석은 되었다 한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단천 인근의 곡식을 대량으로 매집하여 소련으로 장사도 다니셨다고 들었다. 매해 늦가을이면 범선을 빌려 수천석의 쌀가마니를 싣고, 옛날 사회 시간에 배웠던 소련의 유일한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로 일종의 곡물 수출을 하러 다니셨다고 한다. 내 아버지도 종종 할아버지를 도와 같이 다니셨다는데 어느 해 가을에는 할아버지의 사위(내게는 고모부가 되는)와 함께 장사를 가셨다가, 사위가 할아버지 몰래 하루 밤낮 꼬박 노름을 해서 싣고 간 곡물은 물론 빌린 범선까지 잡혀서 전 재산을 홀랑 날려 버렸단다. 결국 할아버지는 이미 혹독한 겨울이 시작된 소련 땅에서부터 달포가 걸려 걸어서 단천 집으로 돌아오셨다. 상거지 꼴을 하고 돌아오셨다고 아버지는 회상했다.

명절 때마다 술에 취하시면 이 얘기를 언제나 처음 하듯이 그대로 토씨도 거의 안 틀리고 반복해서 얘기하셨다. 할아버지를 따라 아버지도 그렇게 장사를 다녔기에 청년기 때부터 중국과 소련을 여러 차례 넘나들었다고 하셨다. 축구를 좋아해서 선수로도 활약했던 아버지는 가끔 중국, 소련 팀들과 겨루는 축구 시합에 나간 적도 있다고 하셨다. 그렇게 백두산과 개마고원을 여러 차례 지나다니셨던 아버지는 금강산 알기를 우습게 여기셨다. 백두산과 개마고원에 비하면 금강산은 ‘애기’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경험담이 거짓말은 아니었겠지만 내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도무지 당신의 경험과 그 감정에 근접할 수가 없었다.

몇 해 전, 아들과 함께 유럽 몇 나라를 기차로 여행했던 적이 있었다. 지친 아들은 잠들었고, 나는 차창 밖 풍경에 잠겨 무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차는 독일을 지나 벨기에로 가더니 어느새 네덜란드에 진입했다. 순간 나는 뭔가에 감전된 듯, 소스라치는 슬픔을 느꼈다. 국경을 이렇게 넘을 수도 있구나, 국경은 그저 선이거나, 또는 길이거나, 그냥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구나. 생의 대부분을 갇힌 남한 땅에서 살았던 나는, 육로로 국경을 넘는 것을 상상한 적이 없었다. 육로를 통한 월경이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잠든 아들을 확인하고, 나는 눈물을 꽤 흘렸던 것 같다. 갇힌 국가의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상상력을 절단하고 살았다는 뜻일 거다. 억울했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억울했고, 내 삶의 어떤 가능성들이 어느만큼 불구가 되어 버렸는지 알 수 없었기에, 참담하기도 했다.

금지 없는 국경, 열린 가능성, 청년의 내 아버지가 적어도 두 대국(大國)을 발로 건넜던 그 당연한 일들이 내 후대에도 거리낌 없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문재인 대통령의 한 걸음 월경이 그 무한한 가능성의 시초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추신: 인주를 보더니 립스틱인 줄 알고 앞다투어 사려 했다던 소련 아가씨들과 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었을까? 이국의 아가씨들과의 로맨스를 아버지는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어쨌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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