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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17 18:11 수정 : 2019.02.18 15:16

이승욱의
증상과 정상

참 섬세하고 친절한 한 청년이 있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겹치면서 그는 죽기로 작정했다. 핸드폰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주변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한강 다리를 둘러보며 사전답사도 마쳤다. 허무한 마음으로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담배를 피우러 역사 옆의 흡연구역에 들어갔다. 할아버지 노숙자가 다가와 돈을 달라고 했다. 그는 주머니 안에 꿍쳐둔 만몇천원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주지 않았다. 이생의 마지막 술값이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몇몇 사람에게 손을 벌렸지만 모두 외면했다. 청년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쩌면 중동이나 동남아 국가에서 온 듯한 이국 청년에게도 다가갔다. 그러자 그 이국의 청년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환한 웃음으로 미소지으며 주머니에 든 몇천원을 꺼내 할아버지 손에 쥐여드렸다. 어깨를 토닥이며 서툰 한국말로 인사도 건넸다. 청년은 순간 말할 수 없는 따뜻함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자신에게 남은 수중의 돈을 모두 꺼내 드리며 할아버지를 꼭 안았다. 청년은 다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낯선 이들이라 할지라도 나도 따뜻한 친절과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시는 말한다. “나는 언제나 낯선 이들의 친절에 의지해왔어요.” 근대라는 세상이 되면서 공동체는 파편이 되고 친밀한 관계는 언제나 분노나 배신감으로 불안하다. 관계의 밀접도만큼이나 짜증과 상처의 빈도와 열기도 높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주고받은 아픔으로 지쳐갈 때 간혹 낯선 이들의 친절을 마주하면, 아직은 그래도 세상이 살 만하다고 자위한다. 낯선 이들의 친절에나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형편없는 세상이라 실망할 게 아니라, 그렇게라도 의지해서 살아가야 할 세상이 되어버린 것을 인정해야겠다.

난민인지 외국인 노동자인지 모를 이국에서 온 까무잡잡한 피부의 그 선한 사마리아인은 한국의 한 아름다운 청년의 삶을 구했다. 어쩌면 앞으로 그 청년이 살아가며 행할 수많은 선한 행위들로 인해 영향받을 또 다른 사람들은 결국 그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빚을 진다. 어쩌면 그 사람이 내 아이들일 수도, 다른 누군가의 귀한 자녀들일 수도 있겠다. 세상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면 모골이 송연해지며 부끄러운 손으로 옷깃을 만지작거린다. 차마 여미기도 조심스러워서다. 수많은 부채로 내 삶이 유지되었다고 생각하니, 우리는 모두 이름 모를 수많은 사마리아인의 후예일 수도 있겠다.

몇달 전 이 지면에 난민공포증에 대한 글을 올렸다. (예상대로) 가루가 되게 ‘까였다’. 난민에 대한 각자의 불안과 혐오에 근거해 다양한 논리로 내 글에 반박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불안에 대한 내 생각은 똑같다. 그때 말을 한번 더 반복한다. ‘난민은 타자가 아니라 무의식으로 상상하는 우리 자신의 몰락한 모습이다.’

이 청년의 경험을 들으며,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은 어쩌면 우리 자신에 대한 불친절함과 홀대에 잇대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자기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 과연 고통받는 타인을 홀대할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한 불안에 흔들리는 빈도도 위기감도 높을수록 타인에 대한 혐오도 뜨겁지 않을까? 선한 사마리아인은 사실 낯선 이가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닛부타의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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