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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12 18:00 수정 : 2017.02.12 19:19

김곡
영화감독

난 시끄러운 음악을 잘 듣는 편이다. 중학교 때부터 데스메탈 시디(CD)를 모으고 다녔고, 대학 때 만난 노이즈 음악을 여전히 즐기며, 한때 운전을 하며 음악을 크게 듣는 버릇이 있어서 차의 스피커를 반년 만에 작살낸 적도 있다. 오랜 수련과 고행(?) 덕택에 내 귀도 작살이 났는지 가청주파수의 최고·최저음은 잘 듣지 못하는 편이다. 소음이 야기하는 고통마저 사랑할 순 없겠으나, 똑같이 시끄럽다는 이유로 스래시 메탈과 데스메탈을 구분하지 않으려는 자에게 발끈 화를 낼 정도의 소음성애자이긴 하다.

그러던 나에게 해괴망측한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새로 이사간 집, 위층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한 게다. 콩. 콩. 콩. 콩. 새벽마다 들려오는 콩. 콩. 콩. 콩. ‘쿵’이 아니라 ‘콩’임에 주의하라. ‘쿵’이면 발소리일 텐데, ‘콩’이니 도대체 음원의 의미와 형상을 예측할 수 없으니 아놔. 평소 뉴스에서 나오는 층간소음 사건사고를 소음성애자의 권능으로 과감히 비웃던 나에게 이것은 하나의 도전, 그러니까 소음 사랑의 자존심까지 건 하나의 승부였다. 참을 수 있다. 아니 참아야 한다. ‘저건 네가 평소 즐겨 듣던 데스메탈의 생활밀착 버전에 불과해!’라고 되뇌고 되뇌어봤지만 새벽마다, 그것도 새벽 4시라는 해괴한 시간에 반복되는 기기괴괴한 사운드 콩. 콩. 콩. 콩.

이 전투의 승패는 곧 갈렸다. 어느새 나는 새벽 업무를 포기한 채 저 소리가 화분을 옮기는 소리인지, 마늘 빻는 소리인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윗집에 무당이 살아서 새벽기도를 위해서 신줏단지를 옮기는 소리가 아닌지 궁금해하는, 그리고 참다못해 윗집으로 뛰어올라가 소음의 주범을 검거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자존심 구긴 소음성애자를 한번 더 좌절시키는 건, 층간소음의 경우 근원지를 특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 소리는 단지 윗집이 아닐 수도, 즉 건너 윗집일 수도 있고, 심지어 아랫집일 수도 있다는 수위 아저씨와 인터넷 고수들의 충격적인 조언들….

사실 소음은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소음은 단지 압도되고 극복될 뿐, 즉 민감하고 둔감할 뿐이다. 만약 내가 데스메탈과 노이즈 음악을 사랑한다면 한때는 압도되었지만 이제는 그 둔감화에 의해 극복된 나 자신과 그러한 변화, 그리하여 그 혼돈 속에서도 비트와 변박을 읽어낼 줄 아는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는 것일 뿐이다. 소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당신이 공포를 사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포처럼, 소음 역시 그 근원지를 추적할 수 없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공포영화지 공포 자체가 아니듯, 당신은 노이즈 음악을 사랑할 수 있을 뿐 노이즈 자체를 사랑할 순 없다. 소음은 유령이다. 음원의 각 개별 형상과 의미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면서 언제나 우글거리는 덩어리로 당신을 감싸고 안으로부터 채워나간다. 심지어 그 음원이 밖에 있는 것인지 이미 안에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음은 전쟁이다. 소음은 외부자인지 내부자인지 식별 불가능한 적이기 때문이다.

도시생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가 이미 그러한 소음전쟁이며 데스메탈 한 곡조이리라. 개별 의미와 형상을 추적 불가능한 소리들이 모여 만드는 대중의 우글거림으로 권력의 패턴과 변박을 작곡해내니 말이다. 그래서 우글거림은 우리 자신에게조차 유령 같고, 권력자들에겐 공포인 게다. 나? 나는 끝내 이사 갔다. 내게 지금 소음이란, 촛불집회라는 고급지고 아름다운 데스메탈 한 곡조와, 탄핵반대 집회라는 철 지난 삼류 데스메탈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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