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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01 21:32 수정 : 2018.07.01 21:43

김곡
영화감독

에스이에스(S.E.S.)의 바다 팬클럽이 아니다. 바다이즘은 바다를 찬양하는 주의(바다+ism)다. 바다이즘은 바다의 것이라면 하찮은 해초 쪼가리부터 플랑크톤까지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우리의 신념이자 종교이며, 장보고의 후예들이라면 마땅히 지켜내야 할 민족적 자긍심이자 천부권이며, 지구온난화와 함께 가중되고 있는 21세기의 무더위와 열대야에 대항하는 우리의 전략과 전술 자체다. 난 바다이스트다. 바다를 찬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바다이스트는 휴가철만 되면 “나무 그늘만큼 시원한 게 없다”며 산으로 가자는 산의 인간들과 대립한다. 왜냐하면 우리 바다이스트, 해양의 인간들은 바다가 허용하지 않는 그늘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바다이스트는 그늘 따위는 필요 없다. 거부한다. 그늘은 노동 뒤 새참 자실 때나 쓰는 것이다. 투쟁으로 쟁취해낸 우리의 소중한 휴가를 노동과 여가의 사이클에 종속되어 있는 그늘 따위에 양보할 순 없을 터, 우리 바다이스트들은 휴가의 일분일초를 바다의 파도와 그 위로 작열하는 뙤약볕에 폭격당하기를 욕망한다. 게다가 산은 넘어야 할 목표물의 상징이다. 차라리 거대한 결재서류다. 상사에게 욕까지 먹어가며 어떻게 뭉쳐놓은 연휴인데, 여기에서조차 태산만한 결재서류를 오르고 또 오르며, 이날이 아니더라도 1년의 다른 300일을 반복해야 할 노동의 지리멸렬을 애써 재현할 것인가? 반면 수평선에 목표 따위란 없다. 끝이 없기에 넘을 곳도, 정복할 곳도 애당초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바다이스트의 주적은 조오련 선수다. 불굴의 의지로 대한해협을 횡단함으로써 바다를 다시 정복해야 할 산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다이스트는 정복하지 않는다. 바다이즘 사전에 불굴이란 없다. 불굴이 뭐예요? 숯불에 구운 굴인가요? 우리 바다이스트는 일렁이는 파도 앞에 기꺼이 굴하며, 아무리 헤엄쳐도 한 치 앞도 못 나가는 그 패배감, 무력감과 탈진 상태, 그 고통을 외려 사랑한다. 아픈 만큼 휴가가 실감나기 때문이다. 아아아 아픈 걸 보니, 휴가이긴 휴가로구나.

진짜 바다이스트와 가짜 바다이스트의 차이도 여기 있다. 진짜 바다이스트는 넘실대는 파도가 날리는 아구창의 고통, 그늘 한 점 없는 망망대해 뙤약볕에 피부가 익어가는 고통마저 사랑한다. 반면 가짜 바다이스트는 바다의 모사품에 불과할 수영장에 기꺼이 속으며, 각종 편의시설들이 제공하는 안전망 뒤에 숨어 자신의 뺨따귀와 백옥피부만은 보전한 채, 이건 바다다, 이건 바다다, 되뇌는 행복회로에 스스로를 감금시킨다(특히 그들이 건네는 하와이안 펀치의 푸른색이 바다를 한껏 흉내 내니 조심할 것). 하나 수영장은 머릿속의 바다일 뿐, 진짜 바다가 아니다. 거기엔 파도폭격, 피부화형의 실질적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진짜 바다이스트인지 가짜 바다이스트인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무좀에 걸린 뒤 바닷물로 입수해보라. 바닷물 염분의 알칼리 성분에 무좀이 도져서 살이 찢기는 고통에 몸부림칠 때, 그 고통마저 사랑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진짜 바다이스트다. 아아아 무좀이 아픈 걸 보니, 휴가이긴 휴가로구나.

물론 가끔 배반자들이 있다. 산과 바다 중간쯤 되는 강과 계곡으로 피서지를 타협하려는 동지들이다. 그러나 바다이스트 혈맹조직은 대양처럼 넓으며, 가깝게는 계곡 바위의 미끄러운 이끼부터, 멀게는 민물장어의 디스토마까지, 타협한 동지들에게 개고생의 철퇴를 내림으로써 내년엔 그들을 다시 바다로 이끌 바다이즘의 은밀한 화력지원들이다. 그대 아플 순 있어도 외롭진 않다. 만국의 바다이스트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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