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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22 17:28 수정 : 2018.07.22 19:08

김곡
영화감독

풍기야. 얼마나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인지. 한 식구가 된 지 벌써 6년째인데, 이름 하나 부르기가 이리도 어색한 건 행여 그간의 내 무심함 때문은 아닐는지, 벌써부터 미안해져.

풍기야, 기억나니. 네가 우리 집에 처음 오던 날 말이야. 이제야 고백하지만 난 처음에 네 이름이 ‘신일’인 줄 알았어. SHINIL? 명찰 문신이야 뭐야. 하하. 하지만 오해는 곧 경외로 뒤바뀌었지. 넌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운 풍기 중의 풍기였어. 네가 처음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세찬 바람을 던졌을 때, 또 처음으로 고개를 돌리며 회전운동을 뽐냈을 때, 난 아직도 기억해. 그 바람은 태산도 날려버릴 기세였고, 그 회전의 우아함은 다이아몬드도 능욕할 기개였어. 게다가 버튼이 세 개씩이나. 세상에, 미풍이라니. 약풍, 강풍까진 들어봤는데, 세상에, 작을 미(微) 자, 수줍게 작을 때만 쓴다는 그 작을 미, 미풍이라니! 이건 또 뭐야. 연속. 정지. 사이에 이 미스터리한 숫자들은? 세상에. 그건 타이머였어!

풍기야. 네게 빚진 행복을 모두 측정하려면 순간보다 더 작은 단위가 필요해. 넌 내가 작업할 때도 내 옆을 지키며 묵묵히 돌아주었고, 내가 마루에서 티브이를 볼 때도, 무좀약을 바를 때도 묵묵히 돌아주었고, 밥을 먹고 잠을 잘 때도 내 옆을 지켜주었어. 특히 그놈의 미풍, 열대야의 복병 저체온증까지 작살내는 그놈의 수줍은 미풍!

물론 우리는 많이도 다퉜어. 특히 네 뚜껑이 맵시가 좀 안 나길래 펜치로 고쳐주려고 했던 재작년, 기억나니. 네가 내 손가락을 물었잖아. 아 물론, 네가 사과했으니까 괜찮아. 밤 10시에 응급실까지 가서 세 바늘 꿰맨 것 정도야, 뭐. 우린 친구잖아. 아 또 기억나니. 여름 내내 돌렸더니 네가 성질을 부리다가 급기야 파업한 작년 말이야. 파업을 하면 했지, 콘센트에 불은 왜 내는 거니. 아 물론, 네가 또 사과를 했으니까. 또 괜찮아(다음엔 사과할 일을 아예 하지 마). 불이 다행히 방바닥에 그을음만 남기고 꺼졌거든.

물론 나중에 집주인한테 걸리는 바람에 플라잉니킥을 맞았지만 말야. 그래, 위로 고마워. 집주인이 론다 라우지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하하. 이 수줍은 친구야, 죽고 싶니. 하하하. 미풍은 혹시 미친 바람이니, 하하하하. 아참, 나도 깜박 잊고 말 안 한 게 있는데, 그젯밤에 잘 때 켰던 바람이 네 바람이 아니야. 그거 올해 초에 새 식구가 된 ‘어컨이’가 만들어준 바람이야. 그래, 이 바보야. 고작 플라스틱 날개에서 25℃ 자연풍이 나올 리 없잖아. 프레온 가스도 없는 주제에. 하하하. 뭐? 또 손가락 꿰매고 싶냐고? 하하하, 이 수줍은 친구 농담도 잘하네, 하하하하.

풍기야. 어제 너를 퇴원시키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 모터코일이 다 되었다느니, 한일이가 신일이보다 좋다느니 하는 의사 선생님 말씀보다는, 검진실에서 보았던, 이젠 씻어도 떨어지지 않는 네 날개 위의 묵은 먼지 때문이야. 그만큼 우린 함께한 거구나. 고맙다. 하지만 네가 온몸을 돌려서 막아준 6번의 여름 때문만이 아니라, 내 모든 의지를 집어삼키는 그 무더위마다 네가 묵묵히 지켜주었던 그 자리 때문에. 고맙다. 네가 돌리고 돌렸던 그 날개, 그 사이사이엔 내가 폭염을 핑계댈 수도 있었던 무기력의 언저리, 그 아등바등의 순간들이 새겨져 있어. 네가 돌았던 주행거리는 곧 내가 흘렸던 땀이겠지. 네가 지켰던 그 자리는 곧 내가 버텼던 그 열기겠지. 네 바람만큼 내가 숨을 쉰 거야.

풍기야. 고맙다. 6번의 여름 동안, 내 날개가 되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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