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선(善)을 택하고 그걸 굳게 지켜라(執). <중용>에 나오는 경구이고,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새기려는 말이다. 특히 무기력의 폭염 아니면 오리무중의 태풍, 둘 중 하나만이 있을 뿐 그 중간은 없는 요새에는 더더욱. 그러나 말이 쉽다. 택선고집할라치면 으레 두가지 문제가 귀신처럼 따라붙는다. 첫번째 것은 ‘택선’(擇善)에 있다. 선을 선택하라지만 선이 당최 무엇일지. ‘선’(善)은 ‘착할 선’이 아니라 ‘잘할 선’을 의미한다는 충고를 네이버 옥편에서 득템한다 한들, 상황은 달라질 게 없다. 이 첫번째 의심은 결국 ‘내가 잘한다고 자부하는 것이 사실은 남들 모두 잘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응급처치로 자주 동원하는 검산법들은 있다. 그동안 내가 냈던 결과물 혹은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되짚어보며 내가 과거 행했던 선을 확증해보는 방법이다. 그래도 성에 안 찬다면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과거 했던 택선의 순간으로 되돌아가, 그 순간 내 자신이 품었던 확신과 신념을 역수입해 오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본들 의심이 해소되지 않고 남는다면, 이는 그것이 과거로부터 발굴될 어떤 사치스러운 전리품으로도 막을 수 없는 다음 혼동에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잘하는 것’과 ‘잘하고픈 것’의 혼동. 물론 택선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잘하는 것과 내가 잘하고 싶은 것을 혼동하는 건 아닌지, 그 착각 속에서 나는 내게 주어진 선을 방기하는 건 아닌지. 착각만이 아니라면, 그건 착각 중에 있는 나 이외에 누가 결정해줄는지. 혹자는 하늘, 혹은 신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하늘만이 안다, 신만이 안다고 할 때의 그들 말이다. 아몰랑 일단 그들을 믿어보기로 하고, ‘고집’(固執)으로 넘어가보면 메시께라 두번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그건 선을 고집했을 때 내 포도청에 떨어질 떡고물의 문제, 즉 현실적 보상의 문제다. 얼렁뚱땅이라도 선을 택하여 고집했다 치자, 그래서 내게 떨어지는 건 무엇일까? 어떤 보상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며, 약속이나 되어 있는 것인지? 고집했다가 또 망하는 건 아닌지라는 두번째 문제, 이것은 내 자신으로부터 ‘내가 잘하는 것’과 ‘내가 잘하고픈 것’을 구분하는 데에 성공하더라도 남는 두려움일 터다. 왜냐하면 보상은 내가 아니라, 내가 대면하고 있는 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을 믿어도 세상을 믿지 못하면 풀지 못하는 이 두번째 문제, 첫번째 것보단 고상하진 않을지언정 그 절박함에선 결코 뒤지지 않을 생존의 문제. 경우의 수까지 따져가며 대차대조표를 만들다 보면, 두 문제를 일타쌍피로 해결하고픈 욕심에 성급한 해결책을 마련하게 된다(여러분도 이것을 하리라 확신한다. 1초 만에 땡처리했을 수도 있고 1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지만 당신은 분명 오늘도 이 셈법을 했다. 이걸 매일 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첫번째 일타쌍피는 신도 세상도 모두 믿어보는 것이다. 필요한 준비물은 충심과 믿음이다. 택선은 분명 선일 테고, 고집하면 분명 틀리는 법이 없다는 믿음. 두번째 일타쌍피는 신도 세상도 모두 불신임하는 것이다. 이 경우 준비물은 광기 혹은 똘기다. 택선은 선이 아닐 수도 있고, 고집해도 틀릴 수 있으나, 무궁한 우주의 먼지에 불과할 생에서 그저 선택하고 고집해보며, 그래도 안 되면 다음 생을 기약하는 똘기. 뭘 믿든 안 믿든, 난 어떻게든 택선하고 또 고집할 터다. 결국 저 문장, 혹은 저 문장을 전해준 우리 엄마만은 믿을 테니까.
칼럼 |
[김곡의 똑똑똑] 택선고집 |
영화감독 선(善)을 택하고 그걸 굳게 지켜라(執). <중용>에 나오는 경구이고,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새기려는 말이다. 특히 무기력의 폭염 아니면 오리무중의 태풍, 둘 중 하나만이 있을 뿐 그 중간은 없는 요새에는 더더욱. 그러나 말이 쉽다. 택선고집할라치면 으레 두가지 문제가 귀신처럼 따라붙는다. 첫번째 것은 ‘택선’(擇善)에 있다. 선을 선택하라지만 선이 당최 무엇일지. ‘선’(善)은 ‘착할 선’이 아니라 ‘잘할 선’을 의미한다는 충고를 네이버 옥편에서 득템한다 한들, 상황은 달라질 게 없다. 이 첫번째 의심은 결국 ‘내가 잘한다고 자부하는 것이 사실은 남들 모두 잘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응급처치로 자주 동원하는 검산법들은 있다. 그동안 내가 냈던 결과물 혹은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되짚어보며 내가 과거 행했던 선을 확증해보는 방법이다. 그래도 성에 안 찬다면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과거 했던 택선의 순간으로 되돌아가, 그 순간 내 자신이 품었던 확신과 신념을 역수입해 오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본들 의심이 해소되지 않고 남는다면, 이는 그것이 과거로부터 발굴될 어떤 사치스러운 전리품으로도 막을 수 없는 다음 혼동에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잘하는 것’과 ‘잘하고픈 것’의 혼동. 물론 택선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잘하는 것과 내가 잘하고 싶은 것을 혼동하는 건 아닌지, 그 착각 속에서 나는 내게 주어진 선을 방기하는 건 아닌지. 착각만이 아니라면, 그건 착각 중에 있는 나 이외에 누가 결정해줄는지. 혹자는 하늘, 혹은 신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하늘만이 안다, 신만이 안다고 할 때의 그들 말이다. 아몰랑 일단 그들을 믿어보기로 하고, ‘고집’(固執)으로 넘어가보면 메시께라 두번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그건 선을 고집했을 때 내 포도청에 떨어질 떡고물의 문제, 즉 현실적 보상의 문제다. 얼렁뚱땅이라도 선을 택하여 고집했다 치자, 그래서 내게 떨어지는 건 무엇일까? 어떤 보상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며, 약속이나 되어 있는 것인지? 고집했다가 또 망하는 건 아닌지라는 두번째 문제, 이것은 내 자신으로부터 ‘내가 잘하는 것’과 ‘내가 잘하고픈 것’을 구분하는 데에 성공하더라도 남는 두려움일 터다. 왜냐하면 보상은 내가 아니라, 내가 대면하고 있는 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을 믿어도 세상을 믿지 못하면 풀지 못하는 이 두번째 문제, 첫번째 것보단 고상하진 않을지언정 그 절박함에선 결코 뒤지지 않을 생존의 문제. 경우의 수까지 따져가며 대차대조표를 만들다 보면, 두 문제를 일타쌍피로 해결하고픈 욕심에 성급한 해결책을 마련하게 된다(여러분도 이것을 하리라 확신한다. 1초 만에 땡처리했을 수도 있고 1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지만 당신은 분명 오늘도 이 셈법을 했다. 이걸 매일 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첫번째 일타쌍피는 신도 세상도 모두 믿어보는 것이다. 필요한 준비물은 충심과 믿음이다. 택선은 분명 선일 테고, 고집하면 분명 틀리는 법이 없다는 믿음. 두번째 일타쌍피는 신도 세상도 모두 불신임하는 것이다. 이 경우 준비물은 광기 혹은 똘기다. 택선은 선이 아닐 수도 있고, 고집해도 틀릴 수 있으나, 무궁한 우주의 먼지에 불과할 생에서 그저 선택하고 고집해보며, 그래도 안 되면 다음 생을 기약하는 똘기. 뭘 믿든 안 믿든, 난 어떻게든 택선하고 또 고집할 터다. 결국 저 문장, 혹은 저 문장을 전해준 우리 엄마만은 믿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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