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증명 없이 삶도 없는 시대다. 우린 더 이상 인증샷 없이 밥도 먹지 않고, 책을 읽지도 않고, 노동도 하지 않고, 여행도 가지 않는다. 블로그에 쓰는 사사로운 수기,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남기는 셀카나 멘트, 모든 것이 인증이다. 설령 몇 사람만이 보고, 최악의 경우 조회수가 0일지라도 우린 결코 인증을 멈추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선 이제 우린 인증하기 위해 살아간다. 인증은 과거에 권력의 통제수단이었지만, 오늘날 우린 그것을 스스로 한다. 물론 반대의 목적을 위해서다. 우린 이제 억압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해 인증샷을 찍는다. 더 내킨다면, 무한한 자유, 완벽한 행복을 인증하기 위해서. 이번 세기, 우린 존재해서 인증하지 않는다. ‘우린 인증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은 존재가 희미해져서다. 지난 세기와 인터넷·에스엔에스(SNS)가 점령한 이번 세기를 비교해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세기는 적어도 존재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존재의 세기였다. 존재는 증명될 필요가 없었다. (억압하거나 억압된) 타자와의 대립이 이미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었으니까. 무료해질라치면 타자의 내감인 죽음, 불안, 공포가 또 증명을 대신한다. 한마디로 지난 세기, 시간은 흘렀다. 흐르는 시간만한 존재증명은 없다. 반면 이번 세기, 인터넷과 에스엔에스에 저리 온전한 타자란 없다. 무한정한 하이퍼링크를 따라 어떤 장애물도, 어떤 저항도 없이, 만인은 만인에 대해 잠재적 친구가 된다. 여기엔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업데이트될 뿐. 불안도 죽음도 없다. 로그아웃이 있을 뿐. 만인이 만인의 잠재적 친구라는 것은 사실 누구 하나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만인이 친구인데 누구 하나 없어진다고 티나 날까. 우린 타자의 필요성을 잃으면서 존재의 필요성도 함께 잃었다. 이번 세기, 우린 존재할 필요가 없어져서 증명한다. 인증샷의 유행은 자기계발 담론의 부상과 결코 무관치 않다. 자기계발 담론은 자기경영하고 자기관리하면 재벌도 되고 대통령도 되는 ‘무한가능성의 자아’를 말하지만, 실상 그건 자아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사회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실제로 이 담론이 롤모델로 삼는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과 무한자유로 주체를 몰아넣고 그 모든 책임까지 자신이 짊어지는 ‘자책의 인간’만을 양산해냈다. 스펙터클의 편재화도 무관치 않을 터다. 하이퍼링크를 타고 스펙터클은 이제 극장에서 안방으로, 안방에서 더 깊숙한 골방으로 들어섰다. 1인 방송 시대가 열어준 가능성은 더 쉽게 스펙터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곧 스펙터클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이제 우린 좋든 싫든 각자의 무대에 몰아세워진 각자의 배우다. 만인이 그 잠재적 관객이다. 그리고 시선이 쏟아질 때, 배우는 뭔가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난 아직도 건재하고 안녕하고 행복함을, 책임지고 증명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혐오는 결코 인증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권위에 저항하는 분노와 달리, 혐오는 더 강력한 권위를 끌어들이는데, 그 권위는 필히 인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상의 권위이기 때문이다. 혐오 역시 자아가 존재감을 잃었을 때 나오는 반응으로서, 인증샷은 필수인 셈이다. 일베는 ‘일베로’(추천) 없이 혐오하지 않는다. 혐오는 셀카와도 같다. ‘좋아요’가 상대방의 피눈물로 대체되었을 뿐. 그러니 증명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는 건 정확한 문제의식이 아니다. 외려 우린 시간 자체를 잃어서, 존재할 이유를 잃어서 증명한다. 사랑의 부족과 미움의 과잉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 ‘좋아요’ 없이 사랑도 못하고, ‘싫어요’ 없이 미워도 못한다는 게 오늘날의 진짜 문제다.
칼럼 |
[김곡의 똑똑똑] 증명의 시대 |
영화감독 증명 없이 삶도 없는 시대다. 우린 더 이상 인증샷 없이 밥도 먹지 않고, 책을 읽지도 않고, 노동도 하지 않고, 여행도 가지 않는다. 블로그에 쓰는 사사로운 수기,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남기는 셀카나 멘트, 모든 것이 인증이다. 설령 몇 사람만이 보고, 최악의 경우 조회수가 0일지라도 우린 결코 인증을 멈추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선 이제 우린 인증하기 위해 살아간다. 인증은 과거에 권력의 통제수단이었지만, 오늘날 우린 그것을 스스로 한다. 물론 반대의 목적을 위해서다. 우린 이제 억압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해 인증샷을 찍는다. 더 내킨다면, 무한한 자유, 완벽한 행복을 인증하기 위해서. 이번 세기, 우린 존재해서 인증하지 않는다. ‘우린 인증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은 존재가 희미해져서다. 지난 세기와 인터넷·에스엔에스(SNS)가 점령한 이번 세기를 비교해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세기는 적어도 존재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존재의 세기였다. 존재는 증명될 필요가 없었다. (억압하거나 억압된) 타자와의 대립이 이미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었으니까. 무료해질라치면 타자의 내감인 죽음, 불안, 공포가 또 증명을 대신한다. 한마디로 지난 세기, 시간은 흘렀다. 흐르는 시간만한 존재증명은 없다. 반면 이번 세기, 인터넷과 에스엔에스에 저리 온전한 타자란 없다. 무한정한 하이퍼링크를 따라 어떤 장애물도, 어떤 저항도 없이, 만인은 만인에 대해 잠재적 친구가 된다. 여기엔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업데이트될 뿐. 불안도 죽음도 없다. 로그아웃이 있을 뿐. 만인이 만인의 잠재적 친구라는 것은 사실 누구 하나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만인이 친구인데 누구 하나 없어진다고 티나 날까. 우린 타자의 필요성을 잃으면서 존재의 필요성도 함께 잃었다. 이번 세기, 우린 존재할 필요가 없어져서 증명한다. 인증샷의 유행은 자기계발 담론의 부상과 결코 무관치 않다. 자기계발 담론은 자기경영하고 자기관리하면 재벌도 되고 대통령도 되는 ‘무한가능성의 자아’를 말하지만, 실상 그건 자아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사회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실제로 이 담론이 롤모델로 삼는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과 무한자유로 주체를 몰아넣고 그 모든 책임까지 자신이 짊어지는 ‘자책의 인간’만을 양산해냈다. 스펙터클의 편재화도 무관치 않을 터다. 하이퍼링크를 타고 스펙터클은 이제 극장에서 안방으로, 안방에서 더 깊숙한 골방으로 들어섰다. 1인 방송 시대가 열어준 가능성은 더 쉽게 스펙터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곧 스펙터클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이제 우린 좋든 싫든 각자의 무대에 몰아세워진 각자의 배우다. 만인이 그 잠재적 관객이다. 그리고 시선이 쏟아질 때, 배우는 뭔가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난 아직도 건재하고 안녕하고 행복함을, 책임지고 증명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혐오는 결코 인증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권위에 저항하는 분노와 달리, 혐오는 더 강력한 권위를 끌어들이는데, 그 권위는 필히 인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상의 권위이기 때문이다. 혐오 역시 자아가 존재감을 잃었을 때 나오는 반응으로서, 인증샷은 필수인 셈이다. 일베는 ‘일베로’(추천) 없이 혐오하지 않는다. 혐오는 셀카와도 같다. ‘좋아요’가 상대방의 피눈물로 대체되었을 뿐. 그러니 증명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는 건 정확한 문제의식이 아니다. 외려 우린 시간 자체를 잃어서, 존재할 이유를 잃어서 증명한다. 사랑의 부족과 미움의 과잉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 ‘좋아요’ 없이 사랑도 못하고, ‘싫어요’ 없이 미워도 못한다는 게 오늘날의 진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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