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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08 17:58 수정 : 2019.09.08 19:43

김곡
영화감독

영화감독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그들은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최대한 비장하게, 질문자가 외려 그 고뇌의 시간을 방해라도 한 듯이 약간은 퉁명스럽게. 그러나 너무 공격적이진 않게,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듯이. 왜냐하면 작품과 사투 중이니까. 나는 예술가니까. “요즘 뭐 하세요?” 작품 구상 중입니다.

저 말이 아니면 실상 종신계약직에 불과한 이 직종을 유지할 핑계가 없어진다. 작품당 2~3년이라는 준비기간은 터무니없이 길다. 인생의 절반이 실직 상태인데도 이직률은 거의 제로. 영화연출은 영화연출밖에 못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는 감독 ㄱ이 편의점 알바를 나갔다가 진열장을 스릴러톤으로 연출하는 바람에 쫓겨났다는 제보도 있다. 샤방샤방 멜로톤으로 연출했어야지. 그러니 이 말을 충분히 연습할 필요가 있다. 아침에 세면대 앞에서도, 길을 걷다 하늘을 보면서도, 잠들기 전 이불 속에서도, 작품 구상 중입니다.

의상과 헤어가 중요하다. 역시 최대한 고뇌에 찬 톤으로 연출하자. 번민의 풍파에 박살 난 듯 조금 후줄근하게, 하지만 너무 눈에 띄지는 않게. 안부를 묻기가 미안하게 비고용 무직 상태를 번뇌의 과정으로 위장하는 거다. 물론 너무 꾀죄죄하면 그게 또 낭패. 얼마 전 아는 감독 ㄴ이 초등학교 앞을 지나다 바바리맨으로 오인되어 민원의 덫에 걸렸다는 제보도 있다. 지나친 의상 연출에 “옷이 단벌이세요?”라고 물어온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그땐 옳다구나 받아치는 거다.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습니다. 작품 구상 중이라.

실전은 당당함이 포인트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최선이나, 일단 눈에 띄게 되면 눈을 넌지시 부라리며 웅변하자. 뭐. 왜. 실직자 아닌데? 나 작품 구상 중인데? 뭐. 특히 양복 입은 사람 앞에서 꿀리지 마라. 손톱 깨물지 마라. 그들 인생에 연봉 개념이 있음이 전혀 부럽지 않은 듯, 뭐. 왜. 나 작품 구상 중인데, 뭐. 상황별 연습도 해두자. 장례식장이 어렵다. 망자 앞에서도 연출해야 하기에. 그러나 어떤 망자도 굽어살필 터, 큰절 두번 하고 마지막 반절에서 되뇔 것. 근조. 작품 구상 중입니다. 명절은 최고 난코스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고모나 사촌들이 꼭 있다. 그땐 부침개를 부치며 고뇌하는 척하거나, 그래도 안 되면 멱살이라도 잡는 거다. 고모, 노는 게 아닙니다. 작품 구상 중인 겁니다.

첨언. 감독끼리 모이는 곳엔 가지 말 것. 아무리 티 안 나게 연출해도, 다 같이 모이면 티가 난다. 티가 안 나도록 연출된 사람들끼리 모인 티가. 언젠가 한국영화감독조합에 나갔다가 깜짝 놀라서 뛰쳐나왔다. 모인 300명의 한국 감독이 죄다 똑같이 생겼다. 모두 번민의 풍파에 박살 난 듯 조금 후줄근하게, 그러나 너무 꾀죄죄하진 않게. 모두 약간은 퉁명스럽게, 그러나 너무 공격적이진 않게. (떼창) 작품 구상 중입니다!

인생도 한편의 영화고 예술이다. 그리고 많은 시간 우리는 비고용 실직 상태다. 무엇을 위한 삶인지 알 수 없고, 월급도 따로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저 흐르고 몽타주되어, 어느새 명절이 오고 새해가 오고, 또 누군가는 요람으로, 누군가는 장례식장으로 갈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며,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며 그 허공을 번민과 방황으로 채워 넣는다. 우린 모두 영화감독이다. 각자의 시간을 연출하는.

물론 작품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질투도 좌절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태어나지 않을 작품을 위한 구상은 없다. 쓸데없는 구상이라고 닦달하는 주변의 오지랖이 있을 뿐. 그러니 이번 추석에도 당당히 고모의 멱살을 잡는 거다. 결코 노는 게 아닙니다. 작품 구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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