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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06 18:12 수정 : 2019.10.06 19:16

김곡
영화감독

10월 혁명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1920년대, 소비에트 영화작가들은 몽타주를 발견하고서 만세를 불렀다. 한 샷과 다른 샷이 합쳐지면서 새로운 의미가 솟구치며 기존 의미를 뒤엎어버리는 게, 꼭 혁명과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가령 얼굴과 음식을 몽타주 하면 ‘배고픔’이라는 새로운 제3의 의미가 튀어나온다.) 이는 흡사 두 물체가 충돌하면 솟구치는 스파크 같은 것, 혁명의 횃불일지니. 몽타주 만세, 스파크 만만세.

오늘날의 호흡으로 보자면 흡사 ‘각기춤’을 추며 용가리 화염이라도 토악질할 듯 포효하는 저 투박한 몽타주엔, 분명 명명하기 힘든 뭔가가 솟구치고 있다. 솟구치던 것은 샷 안엔 없던 다른 의미, 다른 이미지, 다른 세상, 즉 ‘샷 바깥의’ 이미지였다.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가려 보이진 않으나 분명 현실에 잠재해 있던, 어떤 바깥. 그래서 에이젠시테인은 몽타주의 충돌을 샷 바깥으로 나가는 “도약”이라고 불렀고, 베르토프는 뉴스릴을 콜라주 하며 “무대 밖으로 나오라”고 관객을 닦달했다. 푸돕킨은 바깥에 가장 집요했던 작가였다. 그는 어떤 상황을 표현할 때, 상황의 외연을 넓힐 수 있는 가장 먼 외부부터 찾았다. 두 사람이 싸우는 상황에선 얼굴과 주먹만이 아니라 발도 찍어서 편집했고, 죄수가 갇혀 있는 상황에선 감옥에서 가장 먼 한가로운 공원을 함께 편집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어머니>의 낙숫물. 남편을 잃은 여인의 비애를 표현하기 위해 그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수도꼭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샷을 여인의 클로즈업에 편집해버렸다. 상황의 외연이 넓어질수록 그를 인식하는 의식화가 더욱 강렬해진다는 생각에서였다. 소비에트 작가들에게 혁명이란 바깥의 봉기였다. 그 인식·실천의 주체는 프롤레타리아트였고.

물론 스탈린 집권 이후 모든 것이 퇴조했다. 혁명은 완료됐다고 선언됐고, 1934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당의 공식 노선으로 천명되자 모든 변증법 몽타주는 금지됐다. 작가들의 말년은 불행했다. 더는 소비에트 영화에서 봉기하는 프롤레타리아와 각기춤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한국은 정확히 50년 뒤에 겪을 퇴조였다.

광고 전단지에 ‘가격혁명’이 나부끼는 오늘날, 혁명이란 말은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는가. 하지만 있던 무언가가 마주치면 없던 무언가가 솟구친다는 저 혁명의 형식만큼은 아직도 우리의 정치적 삶을 견인하고 있다. 혁명은 더 이상 정권 찬탈, 프롤레타리아트 승리, 노동해방을 뜻하진 않는다. 민중이 힘을 잃어서가 아니라, 국가·계급·노동의 의미가 달라져서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혁명의 본뜻, 바깥을 위한 바깥에 의한 바깥의 봉기, 즉 바깥에의 갈망이다. 2016년 촛불혁명의 인기 슬로건 “이게 나라냐”에 담긴 ‘다른 나라’에 대한 갈망처럼. 또 최근에도 주말이면 모여드는 개혁에 대한 물결처럼.

혁명이란 ‘다른 세상’에의 상상과 열망이고, 그 집단표현으로서의 스파크다. 오늘날 스파크는 촛불로 진화하여, 비록 단일계급의 거창한 횃불은 아니어도 각 개인에게 고루 할당되는 네트워킹의 들불이 됐다. 그것은 각기춤처럼 요란법석하지 않아도 잔잔하고 유려하고 품위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일찍이 내다본 대로 이제 “혁명은 선동되지 않는다”. 21세기가 더 이상 소비에트 혁명가들을 원하지 않는 건 우리 각자가 이미 푸돕킨·에이젠시테인·베르토프가 되었기 때문이다. 각기춤이 없어진 건 우리 네트워킹 자체가 각기춤이 됐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혁명은 격동성을 잃은 대신 자발성을 얻었다. 전문성을 잃은 대신 내재성을 얻었다. 혁명은 이제 우리 뇌수 속에도 있다. 남은 일은 몽타주뿐. 부딪히고 마주쳐서 스파크를 일으켜 ‘다른 세상’을 솟구치도록 하는, 그런 사소하고도 역사적인 과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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