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기억나지 않음, 형사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스미디어(2016) 2015년 장르 소설계 최고의 화제작 중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찬호께이의 <13.67>(한스미디어)이다. 소설 내적으로 보면 역사적 걸작까지는 아니라도 모자라는 점을 찾을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개개의 사건 구성이 깔끔하고, 경찰소설로서 인물도 생생했다. 또한 사건의 시간을 역순으로 배치함으로써 여분의 미스터리를 만들어낸 서사 기술도 효과적이었다. 거기에 대중소설로서 현대의 홍콩을 충실하게 묘사해서 풍취를 더했다. 그러나 <13.67>은 예기치 않게도 소설 외적인 면에서도 영향을 더 크게 발휘한 작품이 되었다. 딱히 사전 정보가 없이 입소문만으로 독자들에게 이만큼 사랑받은 소설도 드물었고, 영미권과 일본, 그리고 북유럽 몇몇 나라가 지분을 차지하는 한국의 추리소설 시장에서 동시대의 홍콩 추리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선명히 각인시켜주었다. 나 또한 홍콩의 누아르 영화를 보고 자랐고, 생애 처음으로 팬이 된 연예인도 홍콩 배우였으나 홍콩의 서사적 저력은 어느덧 잊고 있었다. <13.67>의 존재는 추리소설에 대한 지평과 기대를 넓혔으며, 대중 서사 공동체로서 동아시아의 경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최근 출간된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2011년 작으로 <13.67>보다는 앞서 쓰인 작품이지만, 찬호께이의 작가적 기술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2003년 홍콩의 한 아파트, 남편과 만삭의 아내가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그 범인으로 몰리던 한 남자는 자동차로 질주,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사건 이후 얼마가 지났을까, 차 안에서 깨어난 남자는 어제까지의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아파트 부부 살인 사건을 조사하던 형사 쉬유이라는 기억밖에는 없다. 그는 여성 기자 아친과 함께 과거의 흔적을 밟으며 진실로 들어간다. <13.67>도 마찬가지였지만, 찬호께이의 설정은 기발하거나 특이할 것이 없다. 이미 알려진 것과 다른 진범을 추적하는 형사, 그리고 자신의 기억을 추적하며 자기를 알아내는 탐정은 전통적 추리소설에 많이 쓰인 시작점이다. 그러나 찬호께이의 작가적 능력은 유형에 가까운 구성을 십분 활용하는 데서 발휘된다. 여러 개의 퍼즐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큰 그림은 대강 눈에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퍼즐을 맞추는 방식에 그만의 특징이 있다. 그는 1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독자들이 열광했던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틀을 급진적으로 깨지 않고서도 여전히 긴장감이 넘치는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가이다. 찬호께이 소설의 다른 특징인 당대성은 홍콩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넘어서서 지금 이곳에서도 유효하다. 소설은 멀지 않은 과거와 현재를 다루며 홍콩의 문화적 혼성성과 동시대 도시로서의 현대성을 언뜻 내비친다.
박현주 에세이스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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