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이도우 지음/시공사(2018) 최근 <하트시그널>이라는 프로그램이 선풍적인 인기라는 말을 듣고서, 몇 번 보았다. 여덟 명의 남녀가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연애 상대를 탐색하는 데이트 쇼이다. 인기가 있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슴이 떨리고 설레는 연애의 감정들이 스펙 좋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비교하는 경쟁 구도 속에서는 게임 요소로 바뀌어버린다. 시청자는 특정 출연자를 응원하고, 그들의 감정에 이입한다. 화면 너머로 흐르는 절절한 감정이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일련의 규칙 아래에서 발생하고 편집된 것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 텔레비전의 연애는 현대의 연애와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읽으면서 이 느리고 깊은 연애소설이 지금의 <하트시그널> 세대에게 얼마나 호소할 것인가 생각했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시공사)에서 옛 가요를 틀어주는 라디오 방송의 피디(PD)와 작가의 사랑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렸던 이도우 작가는 이제 북현리라는 마을에 있는 외딴 독립 서점 굿나잇 책방과 호두하우스라는 펜션을 배경으로 그림책 같은 이야기를 빚어냈다. 이 책은 현실이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가족이라는 상처를 입은 해원과 은섭, 두 사람이 어린 시절의 풋사랑을 넘어 거친 세상을 돌아 다시 만난다는 설정도 그렇지만, 굿나잇 책방에서 함께하는 조촐한 북클럽, 은섭이 비공개 블로그에 적는 가상의 독립출판물 감상들도 오래전 읽었던 소년 문고처럼 고전적이다. 해원의 이모인 명여는 한 곳에 묶이지 못하고 세계의 황야를 향해 떠나고야 마는 자유로운 여성으로, 메릴린 로빈슨의 <하우스키핑>(마로니에북스)에 나오는 이모를 떠올리게 한다. 북현리 사람들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지만 대체로 선량하고, 악한 인물들은 오로지 과거에 있다. 질투도 없고, 경쟁도 없는 연애 이야기는 자극적인 데가 없다. 오랜 오해와 깊은 아픔이 있기는 해도 이 소설은 큰 기복 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어릴 때 읽었던 <버드나무 숲에 부는 바람>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 시시하지만 남다른 경험을 소중히 생각할 수 있는 사람, 늦은 밤 서점의 불빛을 보면서 마음속 온기를 느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그리움과 함께 읽을 수 있다. 사랑은 눈앞에 큰 바다와 높은 산이 있어도 그를 넘어서 만나러 가는 것이라 한다. “날씨 좋은 날 만나자”는 말은 만나지 말자는 뜻을 에둘러 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하지만 날씨가 정말 좋은 날에 반드시 약속을 지켜 찾아가는 일, 그런 날에 꼭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있는 일이 사랑의 한 형태임을 이해하는 사람들도 어딘가에 있다. 이 소설은 그런 믿음으로 쓰였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책의 초반에 나오는 스코틀랜드 민요 ‘포팅게일의 늙은 로빈’의 구절을 닮았다. “첫잠에서 깨어나 뜨거운 차를 만들면 다음 잠에서 깨어날 때 슬픔이 누그러지리라.”(19쪽) 추운 밤 깨었을 때 다음에 또 외로이 깰 때를 생각해서 미리 우려내는 차처럼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이야기. 언젠가 쓸쓸한 밤에 문득 깨어 한 장을 넘기고, 다음 잠에서 깨어났을 때 또 한 장을 넘기면 어느새 우리의 슬픔이 누그러질 것이다. 박현주 작가, 번역가
기사공유하기